얼마 전 친구에게 선물 받은 무드등을 켜 봤다. 포장을 뜯고 기뻐한 지는 한참 지났는데 보름이 지나서야 전원을 눌러 보게 됐다. 그 동안 선물 받은 등을 켜 볼 시간도 없었나. 돌이켜보면 그것도 아니었다. 등이야 버튼 하나 딸깍 누르면 켜지는데, 전원을 킬 수도 없을 만큼 바쁜 삶을 사는 중은 아닐 테다.

  선물을 가져오는 길에 이 등을 처음 켜는 순간에는 그 아래서 책을 읽고 일기를 써야지하고 다짐했다. 반드시 완벽한 새벽을 보내고 싶었다. 그 다짐이 자라난 순간부터 무드등 켜기는 숙제가 돼 버렸다. 책 읽기와 일기 쓰기라는 멋진 계획이 무드등을 켜보는 일을 자꾸만 미루게 했다.

  막상 켜보니 무드등 불빛은 글을 읽고 쓰기에 너무 어두웠다. 잠드는 데 맞춰진 은은한 빛이기 때문이다. 신중했던 첫 개시는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무드등을 어떻게 쓰는지 보다 선물해준 친구의 마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은 결과였다. 제대로 써보겠다고 머뭇대지 않고 그저 딸깍켜보기라도 했더라면 소중한 선물을 좀 더 일찍 느낄 수 있었겠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무드등을 켜는 일과 비슷한 과정을 신문사 책상 앞에서 여러번 겪었다. 소수자를 위한 다양한 기획을 연재하려는 부서 계획에 맞춰 장애인 또래도우미 제도의 허점을 취재 아이템으로 준비했다. 기획 과정에서 취재 질문에 무지한 요소가 섞이지는 않았는지 아니면 애초에 기획 자체가 무례하지는 않은지 고민을 거듭했다.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제도를 굳이 트집 잡는 건 아닐지 걱정도 됐다. 혹시 기자의 시선이 소수자들을 취재 대상으로만 타자화하고 있지는 않은지 끊임없이 점검했다. 고심 끝에 기획 자체가 경솔하다는 결론에 다다랐고 회의를 통과했던 또래도우미 기획을 스스로 포기했다. 이러다 기자로서의 목소리를 잃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약품 점자표기 의무화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 준비에 들어가면서 고민은 더욱 커졌다. 인터뷰에 앞서 사전 질문지를 작성하던 중 장애인을 위한 사회적 비용이 늘어나는 현상에 대해 당사자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질문이 불쾌하게 다가갈까 염려됐다. 선행 자료를 찾아보다가 비슷한 질문에 개인적인 영역이라며 답변을 거절한 사례를 발견했고 질문을 삭제했다.

  그러나 현장에서 삭제했던 질문을 우연히 건네게 됐을 때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취재원은 기다렸다는 듯 열변을 토했다. 그의 열띤 답변을 들으며 지나친 자기 검열은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웠다. 소외된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꺼낼 기회를 저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건강한 욕심을 부리기로 결정했다. 대상을 향한 섬세함과 민감함은 잃지 않되, 올곧은 목소리를 지킬 수 있는 욕심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레 겁먹지 않아야 한다. 안정된 기획도 좋지만 처음 그 이야기를 담으려던 취지를 떠올리며 우선은 부딪혀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무드등을 켜기에 가장 완벽한 새벽을 마냥 기다릴 수는 없다. 먼저 딸깍전원을 눌러보고 빛을 살펴보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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