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겁다.’ 첫 기사를 쓰면서 느꼈던 감정입니다. 취재지시를 받았을 때와 사뭇 달랐죠. 단어 하나를 선택하는 데도 조심스러웠고 매끄러운 문장을 만들기는 더욱 어려웠습니다. 머뭇거리던 손가락이 결국 멈춰버렸습니다. 자신감 넘치던 기자가 한순간에 어리숙한 소년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 명의 취재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소 서투르나 열렬히 목소리를 높이던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지키고 싶다”며 투쟁을 이어가고 있었죠. 기자는 그 사람의 목소리를 빌렸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모두의 연대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이 정도면 만족스러운 취재였다’고 생각한 순간, 어딘가 찜찜한 기분이 듭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떠올랐죠. 투쟁보다 호소의 목소리를 냈다가 떠나간 전임자가 그 주인공이었습니다. “우리는 싸움을 원하지 않는다”며 “자발적인 도움을 요청하고 싶다”고 진심 어린 호소를 남긴 채 그는 떠났습니다. 

  투쟁과 호소 사이에서 기자는 고민했습니다. 어느 방향을 택해야 좋은 기사를 썼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 선택이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리라 짐작했습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말이 언론의 속성을 대표하는 속담인 것처럼 말이죠. 자신이 휘갈긴 펜이 누군가를 찌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아마 기사가 가지는 반향, 즉 기사의 무게를 느꼈던 것 같습니다. 

  갈림길에서 고뇌하던 찰나 입시를 준비할 때 부모님이 해주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흔들리면 안 돼. 네가 이성적으로 판단해 맞다고 생각하면 밀고 나가야 해.” 입시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힘이 됐던 부모님의 말씀은 지금 상황에도 적절했습니다. 흔들리는 주관이 정론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모든 글에는 주관이 담겨있습니다. 단어의 선택부터 문장의 구성과 전체적인 메시지까지 하나의 기사를 완성하기 위해 기자는 끊임없이 고뇌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기자의 주관이 담기지 않은 글은 무게가 없는 글이며 정론이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글이 어디로 향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기자의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되돌아봤습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기사를 쓰는가.’ 답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부조리한 현실을 고발하고 소수자의 권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결국 기자는 투쟁을 택했습니다. 호소보다는 투쟁이 소수자의 목소리를 더욱 강하게 키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다만 기자의 주관이 신문의 중립을 깨뜨리면 안 됩니다. 기사의 전제는 정확한 정보전달이니까요. 취재원의 목소리를 빌릴 때 그의 목소리를 마음대로 바꾸지 않았고 한쪽의 입장만을 취사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꼼꼼한 팩트체크와 크로스체킹은 기자의 주관을 이유 있는 신념으로 바꿨습니다.

  여전히 기사를 쓰는 손은 무겁습니다. 아직 수많은 조판이 남아있고 다양한 취재를 하면서 기자의 가치관이 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지난주 아로새긴 초심을 떠올리며 기자의 본질로 돌아갈 것입니다. 나의 주관을 근거있는 신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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