꺼지지 않는 독립운동 정신과
시인 박두진의 고향
그 현장에 가다

‘해가 뜨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 엄혹한 현실 속 간절히 희망을 바랄 때 쓰는 표현이다. 안성에는 일제강점기라는 어둠을 향해 ‘해야 솟아라. 해야 솟아라. 말갛게 씻은 얼굴 고운 해야 솟아라.’라며 생명의 근원을 노래한 시인이 있다. 바로 한국 현대문학의 거장, 박두진이다. 또한 안성은 자랑스러운 3·1운동의 역사가 깃든 지역이기도 하다. 지난 2017년 말 기준으로 경기도에서 가장 많은 독립유공자를 배출했기 때문이다. 경기도 안성시에 위치한 ‘안성3·1운동기념관’과 ‘박두진문학관’에 직접 방문해 역사적 발자취를 되짚어 봤다.

  마음을 가다듬으며

  첫 행선지는 안성3·1운동기념관이다. 구불구불한 만세로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만세고개’ 일대에 도착했다. 안성 3·1운동의 열기가 정점에 달했던 1919년 4월 1일, 만세운동의 흐름이 이 고개에서 합쳐졌다. ‘만세고개’라는 이름도 3·1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과거에는 성은고개 혹은 양성고개라고 불렸으나 안성 독립운동의 역사와 정신을 기리기 위해 지난 1991년 ‘만세고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기념관에 들어서니 낯선 태극기들이 휘날리고 있다. 조선 말기 의병장이 사용했던 불원복 태극기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인 데니 태극기까지. 태극기의 옛 모습들이다. 뒤를 돌아보니 대형 국기 게양대가 보인다. 게양대에도 3·1운동의 의미가 담겨있다. 안성 3·1운동에서 숫자를 따와 그 높이가 31m라고 한다. 선열들의 든든한 동지였던 태극기를 마주하며 기자의 마음도 엄숙하고 경건해진다.

안성3·1운동기념관(안성시 원곡면)의 계단에서 만세를 부르짖은 안성 선열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 김정훈 기자
안성3·1운동기념관(안성시 원곡면)의 계단에서 만세를 부르짖은 안성 선열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 김정훈 기자

  평범한 이들이 외친 특별한 독립 의지

  전시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제3전시관에는 ‘2일간의 해방’의 배경이 된 만세운동과 실력항쟁의 모습이 펼쳐진다. 일제에 저항하며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파괴하는 군중의 모습이 모형으로 재현돼있다. 학생부터 농민까지 다양한 계층이 모여 만세운동을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제5전시관에 들어서면 벽면 전체에서 안성 독립운동가 수형기록카드를 볼 수 있다. 사진 속 안성 선열들의 모습은 우리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그 때문에 이들이 품었던 독립 의지는 더 숭고하게 느껴진다. 관람객 김민경씨(62)는 선열들의 사진을 보니 눈물이 난다며 소감을 전한다. “안성이 3·1운동 주요 항쟁지라는 사실은 처음 알게 됐어요. 올해가 3·1운동 100주년이기도 하고 요즘 시국과 관련해서도 관심이 가네요.”

  선열들의 사진을 지나 기획전시실로 향한다. ‘안성 3·1운동 100주년, 만세운동의 주역을 기억하다’ 특별전이 진행 중이다. 안성 3·1운동이 일어났던 각 지역의 만세운동 주역들과 그들의 죄명 및 판결 내용을 기록한 판결문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이 자료는 안성이 ‘3대 실력항쟁지’라는 입지를 세울 수 있었던 근거이기도 하다.

  전시관을 나와 계단을 타고 올라서니 사당이 보인다. 안성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을 모시는 ‘광복사’다. 매년 11월 순국선열의 날에는 선열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 제례 행사가 진행된다. 위패를 살펴보니 비슷한 이름들이 눈에 띈다. 한마을에 살던 일가친척이 독립운동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위패가 모셔진 선열 316분 중에는 광복군 활동과 의병 활동을 전개한 분도 있었다. 부모와 자식 그리고 형제들이 함께 외치는 결연한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해처럼 떠오른 시의 영감

  차를 타고 약 30분간 이동하자 두번째 행선지가 보인다. 안성맞춤랜드 북쪽에 위치한 박두진문학관이다. 박두진문학관은 시인 박두진의 문학사상을 알리고 체계적인 자료 수집 및 보존을 위해 세워졌다. 전시 공간 입구에 박두진 연보가 길게 나열돼있다. 혜산(兮山) 박두진(朴斗鎭)과 안성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다. 1916년 안성에서 태어난 박두진은 안성 보개면 동신리 ‘고장치기’라는 마을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고장치기는 청룡산(서운산) 줄기가 지나가는 작은 빈촌이었다.

  청룡산 줄기 너머로 비쳐오는 햇빛과 고장치기의 짙푸른 하늘은 그에게 시적 영감을 줬다. 이동희 문화해설사(박두진문학관)는 안성의 자연이 박두진 시의 밑천이 됐다고 설명한다. “박두진은 몸으로 체험한 안성의 자연을 서정시로 표현했죠. 그는 청룡산 너머 이글이글한 아침 햇살을 보고 자랐어요. 이는 대표 시 「해」의 창작 동기가 됐습니다.”

  암울한 현실을 밝히는 ‘푸른’ 등불

  전시관에서는 1939년 박두진이 정지용 시인의 추천으로 등단하게 된 『문장』이라는 문예지를 볼 수 있다. 시인으로 등단한 박두진은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에 따라 우리말로 시를 쓸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문예지 『문장』이 폐간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두진과 시인들은 우리말 시 창작을 멈추지 않았다. 해방 이후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이 함께 발간한 시집 『청록집』에 그 노력이 담겨있다. 전시관에서도 푸른 사슴이 그려진 『청록집』 원본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집의 이름을 따 세명의 시인은 ‘청록파(靑鹿派)’로 불리게 된다. 그들은 순수한 자연과 인간의 본성을 시로 표현한 문학 유파였다.

  박두진은 서정시인이지만 현실을 떠나 자연만을 노래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해」에서는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드러난다. 또한 시 「어서 너는 오너라」에서도  탄압받던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되는 미래를 염원하고 있다. 박두진은 이후 6·25 전쟁과 독재정권 시절 시집 『거미의 성좌』와 『인간밀림』을 통해 정치 상황을 비판하며 삶의 의지와 휴머니즘을 주제로 시를 썼다.
박두진문학관 한 바퀴를 돌자 이동희 문화해설사가 박두진 자화상 앞에서 설명을 마무리한다. “박두진은 우리말로 자유롭게 시를 쓸 수 없는 시대를 살았어요. 그럼에도 끝까지 우리말 시를 지키며 자신이 지향하는 세계를 고집한 소중한 시인이죠.”

  전시관을 나와 넓게 트인 전망대에 올라가 본다. 안성의 끝없는 푸른 들판과 산맥 사이로 햇빛이 펼쳐진다. 어린 시절 박두진의 눈에 담겼을 이글이글한 햇빛을 떠올려본다. 풀빛에 햇빛이 반사되며 눈부신 물결이 넘실거린다. 뜨거웠던 3·1운동의 인파가 펼쳐지는 듯했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박두진문학관(안성시 보개면)의 전경이다. 박두진의 시와 함께 설치된 조형물이 인상적이다.  사진 김정훈 기자
전망대에서 바라본 박두진문학관(안성시 보개면)의 전경이다. 박두진의 시와 함께 설치된 조형물이 인상적이다.  사진 김정훈 기자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