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이제는 활짝 펼 때가 왔다. 바야흐로 만물이 소생하는
봄. 한국인에게 있어서 98년도의 봄만큼 기다린 것도 없을 듯 하다. 더구나
캠퍼스의 봄은 새내기들의 싱그러운 웃음 속에서, 긴머리 여학생의 나풀거리
는 옷자락에서 더욱 활기에 넘쳐날 법도 한데.그러나 지금은 IMF시대.

한국의 대학에서 봄을 바란건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IMF 한파는 폭
풍이 되어 대학인들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따른 학
내의 변화도 자연스러운 일. 특히 명목상 `대학의 꽃'으로 불리는 2학년 재
학생의 경우 피부로 느끼는 변화는 엄청나다. 강혜영양(법대 행정학과.2)의
경우도 마찬가지다.강양이 IMF시대의 현실을 직접 경험한 때는 지난 2월20일
에 있었던 졸업식이다. 제주도에 계시는 부모님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드
려야 겠다는 생각에 학내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착오로 인해
구직신청 이틀째 되던날, 아침 일찍 취업정보과에 갔더니 교직원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신청서를 건네주었다. 신청서에 쓰여진 순번은 놀랍게
도 3백24번째. 혼자 힘으로 용돈을 벌어보겠다는 강양의 꿈이 힘없이 무너지
는 순간이었다.개강 후 점심시간만 되면 강양은 후배들 보기가 미안해 진다
. "밥만큼은 나를 믿어!"라고 큰 소리 치던 선배들처럼 한 달 동안은 후배들
에게 그럴듯한 밥집에서 배불리 한끼 먹여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오늘도 여지없이 후배들의 손엔 노란색 식권 한 장이 쥐어질뿐이다. 다행히 올
들어 선배들의 지갑사정이 넉넉하지 못함을 아는 후배들이라 식권 한 장에도
감지덕지 한다. 그래도 덜 미안한 것은 작년에 비해 거의 배로 늘어난 학생
식당 이용자를 보면서 동병상련을 느낀다는 점이다. "저기 좀 봐. 학생식당
에서 밥 먹는 애들이 어디 너희뿐인지 아냐?" 그러면서도 후배들 눈을 마주
볼 수가 없다.98학번 새내기들에게 3월의 밤은 어떻게 비춰질까. 작년 이맘
때, 강양은 거의 하루도 제정신으로 방에 들어온 적이 없었음을 기억해낸다
. 하지만 자신보다 먼저 들어와 말똥말똥한 눈빛으로 `언니'를 기다리는 새
내기 룸메이트 강효미양(공대 전기전자제어공학부.1)만 보더라도 `가난한 시
대'의 술문화가 어느정도로 틀려졌는지는 확연히 알 수 있다.마찬가지로 강
양이 몸담고 있는 단대 동아리인 중앙정책연구회에서도 세미나가 끝나고 뒤
풀이 하는 일은 여간 부담되는 일이 아니다. 심지어 신.복환영회도 미루었다
가 총MT에서 함께 하자는 의견이 채택되었을 정도다.이런 상황에서 영화가
보고 싶을 때면 걱정없이 종로로 달려가던 `그때'를 그리워 할 수는 없는 노
릇. 강양이 평소에 좋아하던 가수 박진영의 새테이프가 나왔을 때도 바들바
들 떨며 지갑을 열었던 그녀다. 이런 강양의 모습이 낯설지 않은 것은 오늘
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예전보다 생
활이 삭막해진 감도 없지 않지만, 나름대로 알뜰하게 생활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것 같아 뿌듯해요." 기자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남긴 이 말 한마디에는
어려운 시대를 헤쳐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엿보인다. 갑작스레 거품이 빠져나
가고 있는 의혈교정이 한편으로는 삭막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강양의 말대
로 한켠에서는 `검소함'을 등에 업은 대학소비문화의 가능성이 새롭게 대두
되고 있는 것이다.

<최보람 기자>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