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에서 시작되는 누군가의 이야기
  • 손의현
  • 승인 2019.05.06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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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어줘서 고마워 I draw: 그리는 것보다 멋진 건 없어 展

 

여러분도 일상 속 사소함에 고마움을 느낄 때가 있지 않나요? 느지막이 일어난 주말 아침이 주는 여유. 때마침 정류장에 진입하는 버스를 볼 때 안도감. 우리가 느끼는 일상 속 고마움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주변의 크고 작은 전시회에서도 긍정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죠. 이번주 중대신문은 드로잉(drawing)과 관련한 국내외 16명의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i draw: 그리는 것보다 멋진 건 없어> 전시회에 다녀왔습니다. 아름다운 색채에 작가만의 가치관이 고스란히 전해졌는데요. 전시회를 둘러본 기자가 전하는 생생한 후기. 함께 살펴볼까요?

 ⑦ ⓒ Tristan Hoare ⓒ Pierre Le-Tan

 

손끝에서 시작되는 누군가의 이야기 사진과 영상으로 경험을 기록하고 공유하는 방식은 어느덧 일상이 됐다. 바로 그 자리에서 현상을 포착해내는 사진과 영상은 생성이 용이하다. 반면 드로잉은 인간이 현상을 경험하고 이를 내재화하는 과정을 거쳐 비로소 시작된다. 이로써 현상은 이성적 사고와 감성을 통해 의미를 부여받는다. 따라서 작가의 손끝에서 조금은 느리게 이뤄지는 드로잉은 ‘영혼과 육체의 총체적 결합’이라는 대체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I draw: 그리는 것보다 멋진 건 없어> 전시회에서는 드로잉이 지닌 특별함을 만나볼 수 있다. 총 16명의 국내외 작가의 드로잉과 일러스트레이션 작품을 선보이는 전시회는 서울 한남동에 위치한 디뮤지엄에서 오는 9월 1일까지 열린다. 각 작가별로 두드러지는 표현기법과 함께 드로잉을 둘러싼 작가들의 생각을 살펴보자.

  선들이 조곤조곤 이뤄낸 하모니 [그림 ⑦]

  아치형 천장 아래 미로처럼 여러 문이 설치돼있다. 일러스트레이션계의 거장인 피에르 르탕(Pierre Le-Tan)의 작품이 펼쳐진 공간이다. 르탕은 프랑스인 어머니와 베트남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지난 1937년 프랑스 파리에 정착한다. 그는 화가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렸을 때부터 미술관을 들락날락할 정도로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정진재 도슨트는 르탕이 재능있는 수집가라고도 전한다. “르탕은 7살 때부터 예술 작품을 수집했다고 해요. 앤디워홀, 데이비드 호크니와 같이 유명한 작가의 작품을 수집했죠.” 르탕은 수집품을 바탕으로 ‘The Collection of Monsieur X’ 시리즈를 그려내기도 했다. 해당 시리즈 작품에는 그가 수집한 도자기나 홀로페르네스(Holopherne)의 머리 조각 등이 사실적으로 묘사돼있다.

  르탕은 매우 촘촘한 선을 마름모꼴로 교차해 대상의 형태와 음영을 표현한다. 검은 선이 무수히 많이 교차해 있음에도 대상이 강박적이지 않고 부드럽게 드러나는 점이 인상적이다. 남휘 도슨트는 르탕이 ‘십자 긋기(cross-stitch)’ 기법을 사용했다고 설명한다. “해당 기법은 르네상스 시대부터 사용됐어요. 서로 다른 선들을 중첩해 명암을 표현하는 방식이죠.” 르탕의 작품은 빽빽하게 채워진 선 때문에 자칫 판화나 프린트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남휘 도슨트는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볼 것을 권했다. 조금씩 어긋난 선들을 통해 르탕이 직접 한 선씩 그려가며 작업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르탕은 연필과 인디언 잉크(lndian ink), 즉 먹물을 사용해 십자 긋기 화법으로 섬세하게 대상을 표현했다. 사용하는 재료와 함께 그림의 표현방식도 아시아계 혼혈인 르탕의 정체성이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천진하게 바라본 세상은 그림이 되어 [그림 ⑤]

  또 다른 전시공간에 들어서자 작품들의 색채가 나른한 오후의 햇살처럼 따스하게 느껴진다. 중국 출신 오아물 루(Oamul Lu) 작가의 공간이다. 오아물은 인테리어 디자인을 전공한 뒤 게임회사 에니메이터로 취직했다. 회사를 다니며 틈틈이 작품활동을 이어가던 오아물은 지난 2014년 전업 작가로 전향한다. 정진재 도슨트는 오아물의 출신 지역이 그의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줬다고 말한다. “오아물 루 작가는 온화한 기후의 중국 남동부 푸젠성(Fujian) 출신이에요. 24절기와 계절의 변화를 주제로 작품을 창작하는 등 따뜻한 기후는 그가 풍성한 식물과 아름다운 자연을 표현하는 데 영향을 줬죠.”

  “제게 그림은 인생을 기록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사람들은 글이나 비디오를 사용해 자기 생각과 삶을 기록하지만, 저는 그림을 이용하죠.” 오아물의 말처럼 그는 여행을 통해 얻은 영감과 일상의 경험을 기록하듯 그려낸다. 벽면에 크게 자리 잡은 「March」과 「Chilean desert」 작품 속 따뜻한 색감의 꽃 사이를 거니는 사람과 강아지의 모습에서 여유로움과 부드러움이 전해진다. 두 작품을 유심히 바라보던 관람객 박시현씨(24)는 넓게 펼쳐진 자연에 비해 인물이 작게 표현된 점이 인상적이라고 말한다. “오아물의 작품은 동양화 구성과 비슷해서 더 친숙하게 다가와요. 진경산수화와 같이 광활한 자연에 비해 작게 표현된 인물에서 동양적인 미가 느껴졌어요.”

  남휘 도슨트는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중국의 ‘소청신(小靑新)’ 표현방식에 대해 언급한다. 소청신이란 어린아이의 순수함을 뜻한다. “오아물의 작품은 동화책의 한 장면 같아요. 마치 어린아이에게 사랑받을 것 같은 순수한 동심, 소청신이 느껴지죠.”

  정형화되지 않은 원석의 강렬한 매력 [그림 ⑥]

  커튼을 열자 어둡고 붉은 배경이 펼쳐진다. 가장 먼저 어두운 공간 속 그윽한 꽃 향이 코끝에 느껴진다. 영국 출신 작가 언스킬드 워커(Unskilled Worker)의 공간이다. 그가 표현한 강렬한 색채와 에너지가 나른한 감각을 날 서게 한다. 마흔 여덟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가정주부 헬렌 다우니(Helen Downie)는 정식으로 미술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가 자신의 예명을 Unskilled Worker, ‘숙련되지 않은 작업자’라고 정한 배경이다.

  그의 작품에서 가장 시선을 끄는 요소는 인물의 ‘눈’이다. 언스킬드 워커가 표현한 인물들의 크고 영롱한 눈을 바라보고 있자면 얼핏 늑대와 같은 들짐승의 눈빛이 연상된다. 남휘 도슨트는 눈에 사람의 성격이나 감정과 같은 본질이 담겨있다는 작가의 생각을 전한다. “언스킬드 워커는 작품을 그릴 때 눈을 가장 먼저 그린다고 해요. 흰 종이 위에 눈을 그리고 그 위에 분필과 파스텔을 퍼트려나가면서 작업하는 방식이 그만의 특징이죠.”

  언스킬드 워커는 작품을 SNS에 게시하며 주목받았다. 이를 계기로 그는 패션 브랜드 구찌(Gucci)와 협업을 통해 세계적인 미술가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그는 SNS가 시간을 빼앗아간다는 비판적인 신념을 여러 작품에 녹여낸다.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깨진 아이폰’이 그 단서다. 남휘 도슨트는 SNS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언스킬드 워커의 입장에 주목한다. “자신과 소셜미디어 간 모순적인 관계를 표현하고자 작품에 깨진 아이폰을 그려 넣었어요. 그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아이폰이 어디에 그려져 있는지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는 관람 포인트죠.”

  이영기 교수(다빈치교양대학)는 영상매체가 대량으로 소비되는 현실 속에서 ‘드로잉’을 통해 자신만의 감각과 느낌을 찾을 수 있다고 강조한다. “드로잉을 통해 능동적으로 자신의 손과 눈을 사용하고 촉감과 질감을 느낄 수 있어요. 드로잉은 무뎌진 감각을 예리하게 하고 자신만의 느낌과 감각을 확보한다는 점에서 고유한 의미가 있죠.”

  누군가는 자신의 일상에서 비롯된 크고 작은 경험과 생각들을 드로잉으로 풀어낸다. 그리는 것보다 멋진 건 없다는 전시의 메시지. 당신은 일상 속 어떤 이야기를 그림에 풀어내고 싶은가?

 

 

참신한 소재와 예측불허의 아이디어를 담은 드로잉 작품으로 사랑받는 작가가 있다. 바로 빈센트 발(Vincent Bal)이다. 빈센트 발은 벨기에 영화감독이자 일러스트레이터다. SNS를 무대로 활동하며 많은 이의 공감을 받는 그는 ‘그림자’를 활용한 독창적인 일러스트레이션 작품을 선보인다. 펜이나 물병, 요리 도구 등 주변 사물의 그림자를 활용해 대상을 표현하는 독특한 작업방식이 눈에 띈다. 벌어진 가위의 그림자를 활용해 카우보이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에는 하나의 사물을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빈센트 발의 통찰력이 돋보인다. 또한 「Typeslicer」작품에서는 다용도 요리칼의 작은 구멍들을 타자기 버튼 형태로 표현한다. 이처럼 그의 작품에선 실제 사물과 실제 사물의 그림자 그리고 그림에 해당하는 일러스트가 조화롭게 삼박자를 이루고 있다.

  정소라 교수(다빈치교양대학)는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사람들이 SNS를 통해 삶의 단면을 공유하고 각자의 재능을 홍보한다고 말한다. “일상적인 소재를 활용해 작품을 비영구적으로 완성하고 대중과 동시간대에 공유할 수 있게 됐죠. 이러한 예술 형식의 등장은 자연스러운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이해돼요.” 또한 빈센트 발이 다루는 재료와 방식이 흥미롭다고 덧붙인다. “주류 미술계에서 거론되는 대표작은 아니지만 결과물은 창의적이고 흥미롭죠. 작품의 재료와 형태가 대중 친화적이기에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평가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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