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한 줄을 위해 수많은 피드백 과정을 거치는 학생 기자에게 글을 쓴다는 일은 늘 낯설고 어렵다. 하물며 내부사정을 알지도 못하는 이가 기사를 비판한다는 것이 필자에게 얼마나 큰 실례인지 모르지 않는다. 다만 이 코너의 의도 역시 모르지 않기에 비판 몇 줄을 겨우 끄적거린다.

  커버스토리를 장식한 족보 기사는 이번 호의 메인 기사로 보인다. 다만 족보 문제를 ‘비윤리적인’ 학생들 차원으로 환원한 논조의 방향성은 아쉽다. 기사는 족보가 거래되는 실태에 대해서만 피상적으로 다루고 있다.

  학내 저작권 문제에 대해 모르는 학우는 또 얼마나 될까. 이미 다 알만한 정보에 법적 지식 몇 줄을 첨언했을 뿐이다. 많은 분량을 할애한 개화기 기획 기사 역시 그렇다. 단지 개화기 시대가 현대에 미화되고 있음을 우려만 할 뿐이다.

  기사의 가치는 하나의 사건을 넓고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데서 나온다. ‘이런 상황이 일어나고 있네? 이건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야’ 같이 학우들을 훈계하는 기사는 필자가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라는 징표가 될 수는 있어도, 좋은 기사가 되지는 못한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학우들이 불법 거래를 한다’가 아니라 ‘거래를 하는데…’에 있으며, 글이 추구할 방향성은 ‘이것은 문제야’가 아니라 ‘이것은 왜 문제일까. 또 이런 문제는 왜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을까’에 있다.

  독자를 대신해 분노하고 울어주거나, 정의로움으로 무장한 채 ‘이건 정말 잘못된 일이야!’라며 훈계하는 글은 좋을 글이 못 된다. 좋은 글은 죽어있던 사고의 일부분을 활성화한다. 그리고 하나의 담론과 토론을 형성하게 한다. 나는 정의감에 취한 기사를 반대한다. 중대신문이 추구하는 좋은 기사의 가치는 무엇인가. 적어도 ‘학우들의 인식 개선 촉구’ 정도는 아니었으면 한다.

이상환
성대신문 편집장
성균관대 글로벌경제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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