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특히 시는 나로부터 출발한다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해 왔다. 어떤 당위나 진리도 나를 관통하며 나에게 절실한 것이 아니면 피상적일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새벽녘 모습을 바꾼 거리를 거닐며 “나는 나로부터 멀리 왔다는 생각”에 골똘히 빠져드는 이근화의 시 <따뜻한 비닐>(『칸트의 동물원』)에 공감했던 이유도 어쩌면 그 때문이겠다. 젊은 날, 나로부터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시를 읽었고 가끔은 끄적였다. 지금은 나로부터 멀어진 내 모습에 새삼 놀라기도 하고 그럼에도 달라지지 않은 나와 마주치기도 한다.

  최근에 우연찮게 여성주의 영화라고 부르기에 손색없는 두 편의 영화를 보았다. <캡틴 마블>과 <콜레트>. 두 편 다 여성의 성장담을 그린 영화였다. 진짜 이름을 잊어버리고 이식된 기억과 통제 속에서 살아가다 비로소 진짜 이름과 진정한 자신을 찾는 이야기가 <캡틴 마블>이라면, 자신이 쓴 소설에 자신의 이름을 붙일 수도 없었던 시절에 지워진 이름을 되찾고 당당한 주체로 거듭나며 작가이자 트렌드세터로 성장해 간 한 여성의 이야기가 <콜레트>다. 이들의 성장에는 자신의 감정과 솔직히 마주하는 용기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누군가의 시선에 맞추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원하는 사람인지 집요하게 물으며 자기감정과 솔직히 대면하고 편견과 굴레를 깨뜨림으로써 이들은 나로서 당당히 설 수 있었다. 사회가 만든 틀에 자신을 꿰맞추지 못한 까닭에 이름을 잃은 여성들이 우리 역사에 많았다. 우리 문학사에도 이름이 기입되지 못하고 사라진 여성 시인들이 있었다. 당장 최영숙 시인의 유고 시집 『모든 여자의 이름은』이 떠오른다. 그들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자리를 찾아주는 일이 앞으로 우리 문학사에 주어진 과제 중 하나다.

  어릴 적 나는 스스로 만든 금기가 많은 아이였다. 금만 밟아도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에 종종 휩싸이곤 했다. 여러 번 금을 밟고 넘으며,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기까지 많은 시행착오가 필요했다. 어리숙하고 순진했던 오래 전의 나와 마주한다면 잘 버텨냈다고 애썼다고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다.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리게 하는 청춘들을 보며 응원의 말을 건네고 싶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들여다보고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을 위해 금을 넘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나를 발견하기 위해 나로부터 달아나는 용기를 발휘하라고 말을 건네어 본다. 그대들은 더 이상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두려움 없이 마주하고 자유롭게 넘나들며 “어깨가 기울어지도록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이근화, 『나는 내 인생이 마음에 들어』, 『우리들의 진화』) 든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기를! 그리고 나를 온전히 이해하며 얻게 된 공감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과 아픔을 보듬으며 아름다운 공동체를 일구어 가는 꿈을 함께 꿀 수 있기를 온 마음을 다해 바란다. 우리 시대 시의 몫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경수 교수

국어국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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