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외국인 노동자 한 명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다. 그는 정확히 매일 오전 6시45분, 내가 타던 통학 버스로 매일같이 출근하던 청년이었다. 근무 태만이 해고의 원인이었다지만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었다. 그 청년은 왜 실업자로 내몰려야 했나. 그날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는 한 유명 연예인의 결혼식. 아차, 우리 동네에서 외국인 노동자 부당해고는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메이저 언론은 물론 지역신문에조차 베트남계 노동자의 이름은 실리지 않았다. 사회 구조가 만든 부당함보다 연예인 결혼식이 ‘이슈’였기 때문이다. 당장 먹고 살길이 없는 한 청년보다 웨딩드레스 가격이 ‘이슈’였기 때문이다.

 언론에 대한 동경이 실망감으로 바뀌던 여름이었다. 착하지도 않은 내가 소수자 인권에 눈을 돌린 여름이었다. 다만 사회복지사가 아닌 언론인을 꿈꿨다. 이유는 간단했다. 언론에는 공익의 책임이 있었다. 사회 부조리를 비판할 의무가 있었다. 그 사명감 하나로 사는 기자들도 종종 있었다.

 다만 근래 한국 언론이 보여주는 모습은 다소 실망스럽다. 권력과 권위를 가진 자들의 목소리에만 힘이 실린 뉴스가 적잖이 보인다. 더욱이 권위에 기댄 보도는 공정하다고 할 수도 없다. 언론의 공정함은 단순히 사실 그대로 보도한다고 해서 절로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보도 내용이 한 치의 오차 없는 사실일지라도 특정 계층의 이야기만 선택적으로 싣는다면 공정성의 가치를 반영하지 못한 것이다. 보도에서 제외된 이들의 이야기는 애초에 수용자가 인식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언론 정의(正義)에 대한 재정의(定義)가 필요한 시점이다. 특히 소수자에 대한 보도가 확충돼야 한다.

 운 좋게도 중대신문에서 소수자에게 목소리를 빌려줄 기회가 더러 있었다. 교육 기회조차 평등하지 못했던 장애 학생, 디지털 사회서 소외된 노년층 등 유독 마음에 남는 취재가 있다. 이들의 삶을 따라가며 나름의 취재 원칙을 체득할 수 있었다. ‘진짜’ 뉴스는 힘없는 이들에게서 나온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가 사회 변화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점. 기성 언론은 가끔 이 같은 논리를 간과한다.

 학보사 기자라면 의당 학내 사건 사고에 주목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적어도 대학이 ‘시민성’을 배우는 공간이라면, 학보는 더욱이 학내 소수자를 조명해야 한다. 언론이 가진 힘을 알맞은 곳에 쓰자는 말이다. 선의가 아닌, 단지 정의를 위해서. 소수자를 다룬 보도는 더불어 사는 삶의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언론을 통해 수용자는 이들 인권을 둘러싼 문제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수자에 대한 조명은 단순히 ‘소수자’라는 특정 계층에게 힘을 싣는 편향 보도가 아니다. 애초에 목소리를 낼 수조차 없던 이들에게 목소리를 빌려주는 공정함으로 보는 편이 합당하다. 우여곡절이 있더라도 묵묵히 이들을 조명하려 한다. 나 하나 살기도 힘든 세상이라지만 소수자도 ‘숨’은 쉬고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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