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굉장한 행운을 타고난 사람이다. 남들이 3년씩 군대에 가던 시절에 대학원 진학과 동시에 특례보충역으로 편입돼 3주 훈련 후 이병으로 제대했다. 또한 석사를 마치고 프랑스 정부 장학생으로 유학 후 대학교수가 되었으니 다른 사람에 비해 적어도 3년 이상의 시간을 번 셈이다. 함께 공부한 선·후배들은 지속적인 노력을 통해 반도체 신화의 주인공, 성공한 벤처기업가 등 선구자적인 모습으로 우리나라의 기술 입국을 선도한 사람들이 많다.

  대학교수로서 교육과 연구를 하며 남는 시간에 취미와 여가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주말 없이 학교에 나와 연구하며 학생들과 새로운 결과를 얻고 논문을 쓰는 데 시간을 보내다 보니 학교와 집을 쳇바퀴 돌듯이 왔다 갔다 했다. 그러다 정교수가 된 40대에 이르러 인생의 목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 문득 시간을 벌게 해준 국가에 대해 무엇을 기여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제 논문 발표, 학회 임원 활동 등이 국가에 기여하는 것인지 개인의 입신양명을 위한 것인지를 고민했고 내가 기여할 수 있는 상대적으로 낙후된 분야가 무엇인지를 찾아봤다.

  그 결과 발굴해 낸 것이 ‘국제표준화’이다. 표준은 우리나라에서도 오래전부터 산업 표준법이 제정되어 있었다. 수출은 대상국이 정한 기술기준에 맞고 규격을 준수하는 제품이라는 인증평가를 받아야 하는데 WTO 체제의 발족은 기술 장벽 해소를 위해 국제표준을 채용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표준의 중요성은 인정하나 기업은 생산과 수출에 바쁘고, 대학은 연구비나 논문과 관련이 없다고 외면하는 분야이다. 엔지니어링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우리 기술을 국제표준으로 만들어 세계로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 국가에 기여하는 길이라 판단해 본인의 전공에 해당하는 표준분야 활동에 참여했다.

  표준은 산업기술문제를 다루고 있으나 교수가 연구하고 논문을 발표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별도로 노력해 표준화 기구를 공부하고 분석해야 한다. 표준을 위한 국제회의 규칙과 진행상황 파악, 총회 결정과정을 이해하고 행동하기, 타국과의 협력 및 견제 전략세우기 등 외교무대와 비슷한 일들이 표준에서도 벌어지므로 이러한 역량을 쌓는 것도 중요하다. 전 세계를 돌며 시차를 극복하고 하루 종일 국기를 앞에 놓고 토론을 하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지만 우리 기술을 국제화한다는 보람을 얻는다.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까지 받고나니 왠지 거꾸로 된 것 같아 감개가 무량하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이야기가 널리 회자된 적 있다. 이 말은 아직도 유효하다. 우리의 기술이 전 세계에 크게 영향을 미칠 때까지 주위를 둘러보면 자기 전공 분야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것들이 존재한다. 사소하게 보이는 것이라도 한 걸음씩 긴 호흡으로 나아갈 때 커다란 성취가 가능하다. 오늘도 표준화 회의 출발을 위해 본인은 가방을 준비하고 있다.

 

권영빈 교수

소프트웨어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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