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전시, 열어줘서 고맙습니다.’ 여러분도 일상 속 사소함에 고마움을 느낄 때가 있지 않나요? 느지막이 일어난 주말 아침이 주는 여유. 때마침 정류장에 진입하는 버스를 볼 때 안도감. 우리가 느끼는 일상 속 고마움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주변의 크고 작은 전시회에서도 긍정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죠. 이번주 중대신문은 문학 작품 뿐만 아니라 그림을 통해 힐링 메시지를 표현한 헤르만 헤세를 만나고 왔습니다. 그의 수채화 원작을 비롯한 유품과 생애 사진 등을 전시한 <헤르만 헤세: 치유의 그림들> 전시회에서 말이죠. 눈과 마음이 편안했던 전시를 둘러본 기자가 전하는 생생한 후기. 함께 살펴볼까요?

『데미안』, 『유리알 유희』 등의 문학으로 널리 명성을 떨친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 그러나 헤세는 그림에도 깊은 뜻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전쟁이 휘몰아치던 고통의 시기를 그림을 통해 이겨냈다. 이처럼 헤세의 삶을 치유한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전시회가 있다. 광명 호반 아트리움에서 진행되는 ‘헤르만 헤세: 치유의 그림들’이다. 오는 6월 9일까지 진행되는 전시회를 통해 헤세가 그림에 어떤 메시지를 담았는지 확인해보자. 

  그림이 어루만져준 상처

  헤세가 마주한 시대는 암흑기였다. 당시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평화주의자인 헤세는 전쟁을 반대했다. 그는 “전쟁의 유일한 효용은 평화가 전쟁보다 훨씬 더 고귀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뿐이다”며 전쟁을 비판했다. 그 결과 헤세는 한순간에 조국의 반역자로 내몰렸다. 이후 지성인들로부터 정치적 비난과 조직적 왕따를 겪은 헤세는 오랜 세월 우울증에 시달렸다.

  류신 교수(독일어문학전공)는 조국으로부터 외면당한 그가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고 이야기한다. “설상가상으로 헤세의 아들은 뇌막염에 걸리고 우울증을 앓던 아내와는 이혼했어요. 정신적으로 정말 힘든 시기였을 테죠.” 이때 그는 주치의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의 권유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은 고통을 치유하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헤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자신의 삶을 구원한 그림을 예찬했다. “내 생애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처음으로 시도한 그림 그리기가 없었다면 이미 오래 전에 내 삶은 지속될 수 없었을 것이다.”

  채연숙 교수(경북대 독어교육전공)는 그림이 헤세의 서사를 담아냄으로써 치유를 돕는다고 전한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표현예술행위에는 치유의 효과가 있어요. 헤세의 그림에는 헤세 스스로의 이미지적 서사가 담겨 있죠. 이야기가 아닌 이미지와 색채 형식으로요.” 나아가 채연숙 교수는 헤세가 극복한 위기가 그의 문학 작품에도 반영돼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책 『페터 카멘친트』의 ‘페터’와 같은 그의 작품 속 인물은 헤세 본인처럼 아픔을 안고 성장합니다. 이것이 그의 작품이 갖는 치유 포인트죠.” 

  헤세를 움직이는 미디어 아트

  전시 공간에 들어서면 붉은 지붕 아래 잎새가 활기차게 얽혀있다. 미디어 아트로 표현된 화면은 밀짚모자를 머리위에 인 채 마을을 가로질러 가는 헤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곳의 배경은 그의 고향 ‘칼브(Calw)’다. 미디어 아트의 다채로움이 잘 드러난 작품 「눈 덮인 계곡」 속 나무가 사계절의 흐름과 함께 모습을 달리하는 장면을 감상해본다. 눈에 푹 덮인 나무에서 부드럽게 꽃이 피는 연출이 인상적이다.

  문학 작품을 읽어내려 가는듯한 차분한 음악도 또렷이 들린다. 전시관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음악의 분위기를 찾아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전시를 주최한 (주)본다빈치 관계자는 해당 전시회가 체험형 전시를 지향한다고 말한다. “눈으로 볼 뿐만 아니라 듣고 느낄 수 있는 전시가 되기를 바라요. 음악은 이를 극대화하는 요소 중 하나죠. 헤세의 그림과 어울리도록 본사에서 직접 제작한 음악이에요.” 

  문학 작품의 특정 구절과 그림을 함께 감상할 수도 있다. 『크눌프』의 한 대목을 석판화와 함께 보여주는 전시 공간에서다. 헤세의 초기 소설 『크눌프』 속 인물 ‘크눌프’를 통해 고향을 향한 향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런 방식의 구성을 전시에서 여럿 발견할 수 있다. 전시 화면에서 글과 그림을 동시에 감상해보자.  

 

  그림 그 이상이었던 자연 

  동화 속에나 나올법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푸르른 언덕 너머 옹기종기 모인 작은 집들이 보인다. 붉은색부터 하늘색까지 따뜻한 색감의 작품이 전시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곳의 배경은 스위스 ‘몬타뇰라(Montagnola)’ 지방이다. 헤세는 조국인 독일에서 외면당해 스위스로 망명했다. 그는 몬타뇰라에서 그림을 그리며 화폭에 풍경을 옮겨 담았다. 

 헤세에게 자연은 단순한 그림 소재 이상이었다. 자연을 향한 애정을 담은 그의 말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자연은 수만 가지 색깔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는 그 단계를 스무 개 정도의 색으로 축소해서 머릿속에 집어넣고 있다. 이것이 그림이다.” 

  류신 교수는 헤세가 자연을 대하는 자세가 남다르다고 전한다. “헤세의 그림은 참 편안합니다. 그의 작품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아요. 오직 풍경으로 작품이 가득 차 있죠. 보는 이는 이 평화로운 풍경을 보고 치유를 받는 거예요.” 실제로 작품 「정원사, 헤세」를 제외하고는 헤세의 그림에 사람과 동물의 모습이 일절 나타나지 않는다. 자연에 대한 그의 사랑이 드러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헤세의 영원한 벗, 정원

  하늘빛 공간에 비가 내리는 듯 하얀 실들이 드리운다. 헤세는 본인이 직접 가꾼 정원에서의 삶을 통해 자연과 교감했다. 헤세에게 정원은 자연을 창조하는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와 동시에 정원은 자연을 거스를 수 없다는 진리를 배우는 철학의 배움터였다. 그는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이라는 제목의 수필집을 통해 정원에 대한 애정을 가득 보여줬다. 이는 30대의 헤세가 자연에 관해 쓴 글을 모아놓은 책이다. (주)본다빈치 관계자는 정원이 전시의 하이라이트라고 설명한다. “전시의 마지막 잔상으로 정원의 모습을 기억하길 바라요. 헤세가 가장 좋아했던 또 다른 별칭이 ‘정원사’일 정도로 정원에 애정을 많이 쏟았거든요.” 

  관람객 강규리 학생(13)은 헤세의 새로운 면모를 볼 수 있는 전시였다고 후기를 전했다. “헤세가 이렇게 많은 수채화를 그린 줄 몰랐어요. 디지털 화면 속에 글과 그림을 함께 보여주는 전시여서 더 새로웠어요.” 헤세는 글만 쓰는 소설가가 아니었다. 자연을 담은 그림을 통해 스스로를 둘러싼 위기를 딛고 일어선 예술가였다. 그가 그림을 통해 얻은 치유의 메시지가 무엇인지 전시회를 통해 확인해보자.

그림을 통해 마주하는 행복

책 『헤르만 헤세처럼 그려라』는 예술이 갖는 치유력과 소통의 역할을 보여준다. 이후 여러 사례를 제시해 독자가 치료법을 직접 배울 수 있도록 구성됐다. 책은 구스타프 융이 그림을 통해 헤세의 아픔을 낫게 해준 점을 바탕으로 집필됐다. 책은 헤세처럼 예술을 통해 자신을 위한 치료법을 찾기를 제안한다.  
 
  책의 저자인 김청영 작가는 독자가 책을 읽고 본인 스스로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길 바란다고 말한다. “타인이 나를 위로하기보다는 내가 나를 위로하는 방법을 찾았으면 좋겠어요.” 그는 이를 ‘몸의 온도를 올리는 일’이라고 덧붙여 설명한다. “몸의 온도가 올라가는 건 몰입하고 있음을 뜻해요. 독자가 책을 읽고 몸의 온도를 올리며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었으면 해요.”

  책 『그림의 힘』 역시 예술치료를 다룬다. 해당 책은 그림 속 장면을 묘사해 공감을 이끌어낸다. 책 중반부에는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밤의 카페 테라스」가 나온다. 독자는 책을 통해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 앞에 자리한 카페를 마주한다. 책은 ‘지치고 힘든데 편안한 데 가서 한잔 하자’라는 구절을 통해 독자에게 작은 위로를 건넨다. 또한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그림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를 통해 ‘그림 속 인물처럼 우리도 사람들과 합체돼 공감대를 형성하자’는 제안을 건네기도 한다. 

  책의 저자 김선현 작가는 책의 첫머리에 예술을 통해 희망을 전하고 싶다는 마음을 전한 바 있다. ‘그림으로 작품을 완성하는 건 나 혼자만의 만족이지만, 미술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도 희망과 도움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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