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게르마니아 2019 ‘임마누엘 칸트: 판단력 비판’

“근대의 에필로그이자
포스트모던의 프롤로그”

미와 유기체 판단으로
자연과 자유의 관계를 풀다

세계를 향한 근본적 물음
뒤흔들고 종합해내기까지

맹주만 교수(철학과)가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정준희 기자)
맹주만 교수(철학과)가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정준희 기자)


칸트의 등장 이후 서양 철학은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새로운 지평에 놓이게 됐다고 평가받는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cois Lyotard)는 칸트 철학을 ‘근대의 에필로그이며 포스트모던의 프롤로그’라 말한 바 있다. 칸트 철학이 한 시대의 막을 내림과 동시에 현대 철학의 새로운 측면을 열었다는 의미다.

  지난달 29일 302관(대학원) 301호에서 2019년 중앙게르마니아가 열렸다. 맹주만 교수(철학과)가 칸트의 『판단력 비판』을 주제 도서로 강의를 진행했다.

  진짜를 찾아라

  흔히 칸트의 저서 중 세계를 뒤흔든 텍스트라 하면 『순수이성비판』을 꼽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판단력 비판』 역시 여러 사람들에게 철학적 영감과 새로운 방식으로 칸트를 읽을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세계를 뒤흔든 텍스트라 말할 수 있다.

  칸트 이전의 철학자들은 세계의 존재와 이를 인지하는 능력을 학문의 목표로 삼았다. 세계를 총체적으로 주관하는 무제약자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철학이었다. 칸트의 세계관은 그들과 달랐다. 우리가 대상을 인식할 수 있는 것은 특수한 조건 때문이며 그 조건에 의해서만 대상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눈에 비친 것으로만 세계를 파악하려는 태도는 실제적으로는 세계가 어떤지 모른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칸트는 과거 철학이 이러한 한계를 무시했다고 주장한다. 감각이 파악할 수 있는 내에서만 어떤 사물을 알 수 있는 것을 현상이라 칭한다.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는 이런 현상들의 총체이기 때문에 칸트는 이 세계를 현상계라 표현한다.

  진짜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칸트는 ‘물자체’라는 개념을 도입했다. 우리가 파악하고 있는 세계는 사물 자체의 세계가 아니다. 진짜 세계는 물자체의 총체로 구성돼 있는 세계인 것이다. 따라서 사람 역시 물자체로서의 인간은 모르고 현상으로서의 인간만 알 수 있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영역은 현상계뿐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현상계는 기계적 법칙에 의해 돌아가는 인과적 세계다. 그 속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어떤 사건 사고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물리적 과정의 결과이다. 자연의 법칙뿐만 아니라 우리가 행동하는 것조차 표면적으로 볼 때는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인다. 실제로 신체가 움직일 때 물리법칙을 위배하지 않는 선에서만 동작이 이뤄지는 사실이 그렇다.

  그렇다면 현상계에 사는 우리에게 과연 자유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의문이 생긴다. 어떤 생각과 움직임이 인과적으로만 결정된다면 우리는 전혀 자유가 없는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유는 어디에

  맹주만 교수는 칸트 철학에서 인간이 지니는 고유한 자유가 있다고 설명한다. “칸트는 자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이 세계에서 실현하는 일체의 목적들이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해진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행동은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사실들에 불과한 것이 아니죠. 반드시 인간의 어떤 의도가 결합해 있습니다.”

  칸트는 현상계에 저촉되지 않는 자유는 물자체계에 속한다고 말한다. 세계를 둘로 나눈 이원적 관점에서 자유는 물자체에 존재한다고 이야기하는 셈이다. 즉 세계는 인식할 수 있고 과학적인 법칙의 지배를 받는 현상계와 인식할 수 없지만 적어도 부인할 수는 없는 무언가가 포함돼 있는 세계인 물자체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세계는 하나다. 맹주만 교수는 두 세계를 통합해 봐야 한다고 설명한다. 세계가 하나이듯 이에 대한 진리 혹은 인식의 체계 또한 하나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자연은 현상계이며 자유는 물자체계다. 하나의 세계가 두 모습으로 분리된 이 모습을 다시 하나의 세계로 순환될 수 있는지 설명하는 텍스트가 바로 『판단력 비판』이다.

  세계에는 자연법칙의 기계적 방식으로만 설명이 되지 않는 현상이 있다. 칸트는 아름다움과 유기체를 대표적으로 꼽는다. 이러한 현상은 필경 자연과 자유가 상호 공동으로 관여하기 때문에 이해될 수 있는 현상이다. 결론적으로 미(美)와 유기체는 전적으로 자연에 속한 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자유에 속한 것도 아니다.

  맹주만 교수는 『판단력 비판』에서 다루는 판단의 성격은 반성적 판단이라고 설명한다. “판단력 비판에서 주제화되고 있는 판단력, 즉 자연과 자유를 매개하고 통일하는 판단력은 반성적 판단력입니다. 반성적 판단력에는 미감적 판단력과 목적론적 판단력이 있습니다. 전자는 아름다움을 대상으로 하고 후자는 유기체를 대상으로 하는 판단력입니다.”

  아름다움에 대하여

  칸트는 아름다움을 도덕성의 상징이라고 칭했다. 이 표현 속에 아름다움과 도덕이라는 개념이 연관돼 있다. 자연현상과 물자체는 분리된 세계고 그런 의미에서 자연과 도덕적 자유의 세계는 분리돼 있는 것인데, 취미판단 속 미(美)는 도덕성의 상징이다.

  따라서 아름다움의 판단은 도덕성과 관련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아름다움에는 도덕적인 선(善)을 연상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꽃이라는 자연 사물을 판단하는 데에는 자유의 영역인 도덕이 연결돼있다. 즉 취미판단에는 자연과 자유가 종합돼 있다.

  숭고판단은 취미판단보다 도덕적 감정을 훨씬 더 많이 일으킨다. 숭고판단은 힘에 대한 판단인 역학적 숭고와 크기에 대한 판단인 수학적 숭고로 나뉜다. 거대한 파도가 밀려올 때 인간은 두려움과 동시에 경외감을 느낀다. 지성의 작은 틀을 벗어나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힘으로 느껴지는 판단이다. 칸트에 의하면 도덕적으로 고양된 인물은 도덕적인 이념을 가질수록 숭고함을 더 느낄 수 있다.

  숭고판단에서 우리는 단순한 인식의 판단이 아니라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와 이를 더없이 크게 담을 수 있는 이성의 능력을 갖는다. 즉 어떤 존재의 거대함에 느껴지는 경외에서 자연과 자유가 상호작용한다고 느낄 수 있다.

  궁극적인 존재

  자연 속 유기체에 대한 판단에서 칸트는 목적론을 사용해 설명한다. 자연 산물은 약육강식을 따른다. 생물체끼리 먹고 먹히는 관계인 것이다. 이와 같은 개념을 설명하는 데에 사용되는 것이 외적 합목적성이다. 그러나 외적 합목적성은 상대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먹이사슬을 합리적인 기준으로 판단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때문에 외적 합목적성은 자연의 유기체를 설명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그에 반해 내적 합목적성은 유기체 각각이 갖고 있는 목적적 활동이다. 인간이라는 유기체는 신체 안에서 일정한 기관들이 합리적으로 작용하며 이를 통해 삶을 이어간다. 모든 유기체가 내적으로는 이와 같은 방식의 활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내적 합목적성이다.

  자연의 모든 사물은 내적 합목적성에 집중한다. 그중에서도 인간은 스스로 목적을 정립할 수 있는 자유의 존재다. 때문에 인간은 자연의 목적을 따르는 일부 유기체와는 달리 자연의 궁극적인 목적이 된다. 칸트는 이러한 존재가 자연 세계에 있다는 것은 자연 세계가 인간을 최종목적으로 삼는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렇듯 자기 목적적인 정립을 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자신이 의도한 것을 표현하는 산물이 문화다. 문화는 인간이 자연 안에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연법칙을 따르며 창출한 결과다. 다시 말해 문화란 자연과 자유가 하나로 통일돼 만들어진 어떠한 방식이다.

  이와 같이 칸트는 그동안의 세계 인식을 바꿔놓았다. 세계와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은 이후 사상가들이 철학을 시작할 때 우선적으로 칸트를 마주해야 하는 결과를 일궈냈다. 칸트 본인은 큰 굴곡 없이 인생을 마무리 했다. 그러나 그의 지성은 여전히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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