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 2차 가해를 행하는 이는 불특정 다수다. 그들은 1차 피해의 책임을 피해자 탓으로 돌린다. 피해를 ‘당할 만 했다’며 피해 상황을 지적하고 가해자를 옹호하기도 한다. 피해자는 수사와 증언 외에 피해 상황의 정당성을 납득시킬 의무가 없다. 그러나 정황을 모른 채 피해 경중을 따지는 제3자 때문에 피해자는 더 큰 고통을 짊어진다. 피해자가 정당한 맥락을 요구받는 사이 1차 가해자는 점점 지워진다. 오만의 탐조등이 비추는 불빛 속 눈을 뜨지 못하는 피해자만 남을 뿐이다.

  2차 가해 행위의 가해자와 피해자는 처음부터 정해진 집단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피해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반대로 누구든 타인을 가해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약자를 향한 2차 가해는 혐오 범죄의 온상이 된다. 2차 가해 행위에 혐오가 더해지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사건과 관계없는 차별적 편견이 작용해 사실 왜곡의 여지도 커지기 때문이다. 이는 약자를 향한 혐오가 난무하는 한국 사회에서 특히 심각하다. ‘Me Too(미투)’로 뜨거웠던 지난해 역시 2차 가해와 여성 혐오가 피해자를 겨냥한 형태로 나타났다.

  와중에 혐오 표현이나 2차 가해가 생각과 표현의 자유라며 권리를 운운하는 여론도 버젓이 존재한다. 그러나 어떤 혐오 행위도 자유라는 말로 꾸 밀 수 없다. 약자에 대한 모욕은 명예 훼손은 물론 대상에 대한 차별을 기저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UN자유권규약위원회의 자유권 규약 제19조 2 항은 모든 사람이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고 설명함과 동시에 3항에서 자유라는 권리 행사가 얼마나 특별한 의무와 책임을 갖는지 경고 한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책임 요소가 ‘타인의 권리 또는 명성 존중’이다. 타자를 향한 하나의 가해가 자유권으로서 여겨질 수 없다는 뜻이다.

  중앙대 역시 2차 가해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몇 달 전 영어영문학과 A교수가 자행해온 권력형 성폭력 피해가 폭로됐다. 이에 일부 학내 구성원은 ‘피해자 진술이 정황적 근거에만 의존하고 있다’며 비판하는 대자보를 작성했다. 오히려 A교수가 권위적인 인물이 아니라는 어조를 내세우거나 피해자를 위한 성명서 작성이 가스라이팅이라는 등 피해자를 의심하는 행실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인권대책위원회는 A교수의 성폭력 혐의와 관련해 징계위원회에 중징계를 요청하겠다며 입장을 밝혔다. 피해자를 저울질했던 일부 구성원의 경단이 2차 가해의 단적인 예시가 된 셈이다.

  제3자가 나서 피해 입장을 의심하는 게 폭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태도와 피해과정이 ‘합리적’이어야 피해자로 불릴 수 있다면 ‘합리적이지 못한’ 모든 피해는 존재하지도 않는 것인지 묻고 싶다. 성인지 감수성 이라는 휘황한 말이 아니더라도 무엇이 2차 가해인지 가늠할 수 없다면 편견의 잣대에 휘둘려 피해자를 비난해선 안 된다. 피해자 중심으로 이뤄지는 사건의 재조명 과정도 하루빨리 바뀌어야 한다. 대학사회의 지성인으로서 올바른 생각을 담지하는건 선택이 아닌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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