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독립만세!’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지난 1일 전국에서 만세 함성이 울려 펴졌습니다. 시민들은 정오에 맞춰 각지에서 다 함께 만세 를 외쳤는데요. 만세삼창이 끝나고 3·1운동 정신을 기리는 다채로운 공연과 체험행사도 진행됐습니다. 사진부는 지난달부터 지난 1일까 지 열린 다양한 100주년 기념사업을 방문했습니다. 광화문, 독립기념관, 서대문형무소 등 14곳을 찾아 뜨거운 순간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가슴 벅찼던 그날의 함성, 사진으로 같이 들어볼까요? 

광화문에 흐르는 태극기의 물결.
광화문에 흐르는 태극기의 물결.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경,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축배를 듭니다. 곧이어 탑골공원에서도 학생, 시민 등 수천 명의 인파가 운집해 독립선언식을 거행합니다. 공원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품속에서 태극기를 꺼내 흔들기 시작합니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백색 물결을 이뤘죠. 

  201931일에도 전국 각지에서 비슷한 장면이 재현됐습니다. 3·1100주년을 맞아 전국 방방곡곡에서 만세운동 기념식과 재현행사가 열렸습니다. 시민들은 한마음으로 만세를 부르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운동의 정신을 되새겼습니다.

평화 시위로 알린 저항 의지

  3·1운동의 핵심 정신은 ‘평화’와 ‘비폭력’입니다. 당시 3·1운동을 취재했던 미국 기자 Nathaniel Peffer는 저서 「The Truth About Korea」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단지 군중이 만세를 부르며 행진을 한 것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일본 경찰이 제아무리 구타하고 발로 차며 헌병과 군인이 총검으로 찌르고 쏘아도 그들은 돌 하나도 던지지 않았다. 그들은 저항도 하지 않았거니와 무기도 없었다.’

  기록에 따르면 시위에서 사망한 조선 사람만 약 7500명이라고 합니다. 반면 시위대의 공격으로 사망한 일본 민간인은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식민 통치를 받고 있던 민족이 평화적 시위를 통해 자주독립을 요구한 사례는 전 세계를 통틀어도 드물죠.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기로 했던 민족대표 측이 태화관으로 장소를 변경한 이유도 수많은 인파로 인한 무력 충돌 사태를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자유와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이 왜곡되지 않고 세계에 전해질 수 있었죠.

앞장선 학생

  종교계 민족대표 이외에도 3·1운동의 준비부터 실행까지 주도한 또 하나의 기둥은 학생입니다. 민족자결주의를 바탕으로 열강에게 독립을 청원하며 외세 의존적 태도를 보인 민족대표 측과 달리 학생들은 자주적으로 독립을 쟁취하고자 했죠. 당시 연희전문학교 학생이던 김원벽 등을 중심으로 뭉친 학생들은 1919년 1월부터 독자적으로 독립운동을 계획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종교계와 접촉하여 3월 1일 만세운동을 함께 준비했죠. 거사 당일 학생들은 탑골공원에서 직접 독립선언식을 거행했고 시위를 주도했습니다. 민족대표들이 태화관에서 체포된 이후인 3월 5일, 남대문 역에서 2차 만세운동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지식인으로서 거대한 무력 앞에 좌절하지 않고 스스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었죠. 학생들은 이후에도 전국 각지로 흩어져 계속 만세 시위를 벌였습니다. 천안 아우내장터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유관순 열사가 대표적입니다.

가슴 벅찬 염원을 담은 31절 D-1
가슴 벅찬 염원을 담은 3·1절 D-1

역사의 올바른 재평가

  광화문에서 열린 ‘제 100주년 3·1절 중앙기념식’에서는 유관순 열사를 포함해 총 334명 독립유공자에 대한 포상식이 있었습니다. 유관순 열사에게는 기존 3등급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가해 1등급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기도 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독립운동은 예우받아야 할 일’이라는 가장 단순한 가치를 바로 세워야 한다”며 친일잔재 청산과 독립유공자 예우가 정의롭고 공정한 나라의 시작임을 강조했습니다.

이상은 일상이 됐지만

  한 시대를 관통해 자리 잡은 정신을 시대정신이라고 부릅니다. 시대정신은 시대의 완결과 동시에 매듭지어지기도 하지만 때때로 사라지지 않고 이어지기도 하죠. 일제의 국권 침탈에 맞서 만세운동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던 기미년 3월 조선의 시대정신은 여전히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근간으로 남아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돼 민주 공화정의 시작을 이끌어냈죠. 나아가 4·19혁명, 6월 항쟁과 같은 역사의 격변을 거쳐 촛불광장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평화민주사회의 역사적 자양분이 됐습니다.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던 그날로부터 한 세기가 흘렀습니다.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던 독립도 찾아왔죠. 하지만 1919년의 시대정신은 변함없이 우리 곁에서 도도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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