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8월 10일. 미국 유학을 떠난 날이다. 하루 전날 지도교수님(정우일 교수님)께서 점심을 사주셨다. 점심을 먹고 나서 교정을 걸으며 교수님께서는 격려와 용기를 주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때 나는 교수님께 평소에 하고 싶었던 질문을 하였다. 미국에 가서 영어로 된 책을 보고 수업을 듣는 것이야 어찌 해보겠지만 레포트와 학위논문을 쓰는 것은 두렵다고. 교수님께서는 어떻게 해내셨느냐고.

  교수님께서는 좋은 질문이라고 하시며 평소 생각하시던 답을 주셨다. 어떤 주제이든 글을 쓰려고 한다면 그 주제에 대해 다른 연구자들이 무엇이라고 했는지를 찾아서 읽다가 보면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쓰면 될 것인지에 대한 아이디어를 스스로 찾게 될 것이라고. 만일 아이디어가 생각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의 글을 덜 읽었다는 증거이니 더 읽으라고. 
나는 다시 교수님께 질문을 하였다. 교수님의 말씀은 공부를 많이 하면 아이디어가 나온다는 뜻 아니냐고.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해보겠는데 공부를 많이 해도 안 된다면 교수님께서 책임질 수 있느냐고. 교수님께서는 웃으시며 책임지겠다고 대답하셨다.

  나는 미국 유학 시절 이 말을 새기고 실천했다. 어느 주제이든 레포트를 쓸 때 그 주제와 관련된 책과 논문을 찾아 읽으면서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 후 해당 이슈에 관한 학자들의 다양한 접근방법과 논의, 문제해결을 위한 제언을 정리하였다. 그러다보면 어느덧 내가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글을 써야 할 지에 대한 방향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도 이대로 실천했다. 머리속이 정리되지 않으면 내가 정한 분야는 이 세상 누구보다도 많이 읽고 정리하겠다는 마음으로 읽고 또 읽었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 학자들의 논의를 내 방식대로 정리하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논점을 정하여 가설을 만들고 실증자료로 분석을 하니 논문이 완성되었다.

  한국에 돌아온 후 몇 개월 되지 않아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할 기회가 있었다. 처음 접하는 과제로 아이디어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사실관계도 생소했다. 내게 프로젝트를 맡긴 친구는 박사학위를 받았으니 어떤 과제도 해낼 수 있으니 잘 부탁한다고 할 뿐, 어떤 힌트로 주지 않았다. 황당했지만 일단 사실관계가 어떤지를 파악해 보았다. 그리고 현장에 가서 실무자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다양한 실무자들이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해결되기를 바라는지를 말했다. 나는 문제를 정리하고 문제별로 유형화했다. 그러다 보니 결과보고서를 쓸 방향이 머리에서 떠올랐고, 해결 방향을 나름대로 정리하여 제출했다. 결과보고서는 바로 정책에 반영되었다.

  교수가 된 이후 제자에게 같은 말을 하고 있다. 아이디어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읽고 정리하다 보면 어느 순간 머리에 떠오른다고. 아이디어는 머리를 쥐어짠다고 나오지도 않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면벽을 오래 한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확인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주장을 읽고 정리해야 나온다고.

박희봉
공공인재학부 교수/사회과학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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