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마, 힘들대.” 중대신문에 들어가려던 나에게 친구가 해준 말이다. 그 말을 무시해 지금까지 고통받고 있다. 친구의 말은 사실이었다. 정말 힘들었다. 주어로 시작해 마침표로 끝나는 문장 하나를 쓰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정보를 수집하고 수집된 정보를 가지고 끊임없이 토론했다. 밤을 새우며 쓰고 고치고 쓰고 고치고를 반복했다. 모니터 앞에서 엎드려 자는 날이 많았고 팔이 저린 채로 강의실로 뛰어 들어간 적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힘들었던 건 아무도 신문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대학신문의 위기는 오래된 이야기다. 기성의 일간지도 보지 않는데 대학신문은 말해 뭐하겠나. 가끔 뭐 하느라 그리 바쁘냐고 묻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중대신문에서 일한다고 하면 돌아오는 답은 뻔했다. ‘그런 게 있어?’ 또는 ‘아…’였다. ‘어디 가면 볼 수 있어?’라는 말은 반갑기까지 했다. 존재 자체를 모르는 사람도 있고 알긴 하지만 본 적 없거나 관심 없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그때부터였다. 계속해서 고민했다. ‘무엇을 해야 신문을 봐줄까.’ ‘어떡해야 내가 쓴 글을 읽어줄까.’ 끊임없이 고민하고 여러 시도도 했다. 이 중 몇 가지는 의미 있는 결과를 보이기도 했다. 이후로도 끝없이 중대신문을 살아남게 해줄 대상과 행위를 찾는데 매달렸다. 하지만 그게 문제였다. 어느 순간 신문사는 ‘살아남기’, ‘대상과 행위’에만 빠져있었다. 주체와 존재 이유를 묻는 물음은 없었다.

  언론은 무엇이고, 대학언론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았다. ‘중대신문’이라는 주어가 빠진 채 대상과 행위에만 집중했다. 그 결과는 부끄러웠다. 이번학기만 세 건의 정정보도를 냈다. 반론보도 요청도 한 차례 왔다. 대학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들춰내기는커녕 눈앞에 보이는 사실조차 제대로 보도하지 못했다. 전문성이 아닌 아마추어를 떠올리게 했다. 기자 대신 아직 학생이라는 말을 뱉었다. 살아남으려 했으나 존재 이유가 흔들렸다.

  힘든 현실 속에서 우리는 그 상황을 벗어나게 해줄 대상과 행위를 찾는다. 그때 주체는 쉽게 잊혀 진다. 하지만 절대로 본질을 잊어선 안 된다. 본질에 대한 질문이 끝난 뒤에 행위와 대상을 생각해야 한다. 「대학」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물유본말(物有本末)하고 사유종시(事有終始)하니 지소선후(知所先後)면 즉근도의(則近道矣)리라’ 라는 구절이다. ‘물건에는 근본과 지말이 있고 일에는 시작과 마침이 있으니 먼저 해야 할 것과 뒤에 해야 할 것을 알면 ‘도’에 가까울 것이다’라는 뜻이다. 그동안 내가 던졌던 물음은 끝을 보고 있었다.

  문장 순서를 보더라도 주어가 가장 먼저 나온다. 주어가 있어야 행위와 대상도 결정된다. 물론 우리말과 같이 주제중심의 성격이 있는 언어는 주어가 생략되기도 하고 행위와 대상이 먼저 나오기도 한다. ‘과거가 그립다’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문장 속 그리움을 느끼는 주체는 ‘나’다. 마침표를 찍어야 할 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있다. 누군가에겐 어리석어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주어가 있어야 마침표를 찍을 수 있기에 말한다. “기자는 문제를 들춰내고 사실을 보도해야 한다. 기자답게.”

조정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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