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다’는 뜻을 가진 ‘free’. 성 역할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하는 ‘gender-free(젠더프리)’는 오늘날 공연계에서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고 있다. 성별 구분이 철옹성 같았던 공연계에서 일어난 젠더프리 움직임은 눈여겨볼 수밖에 없다. 무대 위 ‘자유’를 향한 움직임은 왜,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

  성벽을 넘나들다
  젠더프리 캐스팅은 역할 자체에 성별을 부여하지 않아 남성 배우 혹은 여성 배우라는 제약을 두지 않는 캐스팅을 말한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 역할을 바꿔 연기하기도, 역할 자체에 아예 성별을 부여하지 않은 채 다양한 캐스팅의 가능성을 열어두기도 한다.

  최근 우리나라 작품 중에서 젠더프리 캐스팅을 시도한 작품으로는 대표적으로 뮤지컬 <광화문연가>와 <더데빌>이 있다. <광화문연가>의 ‘월하’는 무성(無性)의 존재인 신(神)으로 각각 남성과 여성 배우가 동시에 맡아 풍부한 볼거리를 제공했다. 또한 <더데빌>의 ‘X’는 기존에 남성 배우가 맡았던 역할에 여성 배우가 캐스팅되면서 인물에 대한 색다른 표현으로 주목받았다.

  원종원 교수(순천향대학교 신문방송학과/뮤지컬평론가)는 무대 위 젠더프리 역사가 생각보다 오래됐다고 말한다. “고대 희랍연극이나 중국 경극, 일본 가부키에서도 젠더프리 캐스팅이 이뤄졌다고 할 수 있어요. 여성이 무대에 설 수 없었던 당시 남성 배우가 여성을 연기한 거죠.”
외국에서 뿐만이 아니다. 정호붕 교수(연희예술전공)는 판소리가 우리나라 젠더프리 캐스팅의 시초라고 밝혔다. “판소리에서는 한 배우가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요. 그러다 보니 남성과 여성의 역할을 자유롭게 오갔어요. 여성 판소리꾼이 놀부나 흥부, 심 봉사를 연기하기도 했죠.” 이처럼 공연에서의 젠더프리는 역사 속에서 다양한 목적과 모습으로 대중과 함께해왔다.

  풍부하게 그리고 평등하게
  이전에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성별을 연기하는 경우가 많았다면 최근에는 의도적으로 젠더프리 캐스팅을 시도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창극 <적벽>에서 연출을 담당한 정호붕 교수는 제갈공명과 주유, 정욱 역에 모두 여성 배우를 섭외하는 파격을 선보였다. 그는 실제 남성이었던 인물을 여성 배우가 연기했지만 서사를 전달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었다고 전했다.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기 때문에 어떠한 성(性)이 해당 역할을 맡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이처럼 오늘날의 젠더프리 캐스팅은 발상의 전환을 통해 더욱 풍부한 공연 문화를 이끌고 있다. “젠더프리 캐스팅은 기존에 생각지 못했던 인물 해석이나 상황 묘사를 끌어내요. 다양하고 신선한 문화를 만드는 데 일조하죠.” 원종원 교수는 젠더프리 캐스팅 시도가 문화산업 발전에 미치는 영향을 높이 평가했다. 배우의 성별이 아닌 인물 특성에 주목하게 하면서 인물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돕는다는 것이다.

  최근 공연계 미투 운동의 등장과 함께 새롭게 각광받는 젠더프리 캐스팅은 성평등을 추구하려는 시도로 해석되기도 한다. 남성 배우의 주요 배역 비율이 현저히 높은 공연계에서 여성 배우가 선택할 수 있는 작품의 폭이 넓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뮤지컬 <광화문연가> 홍보마케팅팀 정다영 담당자 역시 이러한 해석에 동감했다. “남성 배우가 점유해온 영역을 여성 배우가 공유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젠더프리 캐스팅을 반겨요.”

  한편 이러한 관점이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원종원 교수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세우는 데서 젠더프리 캐스팅의 의미를 찾는 시각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젠더프리 캐스팅은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세우는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어요. 성 불균형 문제는 제도의 정비를 통해 극복해야 할 문제죠.”

  진정한 자유를 위해
  몇몇 눈에 띄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젠더프리 캐스팅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주변 인물이 아닌 주요 인물을 젠더프리 캐스팅한 사례가 드물다. 젠더프리 캐스팅이 이뤄지더라도 성 고정관념을 그대로 반영하는 경우도 많다.

  여성 배우를 주연으로 대거 캐스팅해 주목받았던 창극 <적벽>에서도 이러한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정호붕 교수는 해당 작품에서 의도를 가지고 여성 배우를 섭외했다고 말했다. “작품 속에서 제갈공명의 어린 용모를 부각시키고자 여성 배우를 섭외했어요. 전쟁을 이끈 장수를 보조하는 주유나 정욱에 여성 배우를 캐스팅함으로써 주요 인물과의 균형도 유지할 수 있었죠.” 이는 성 고정관념을 타파하고 인물에 대한 다양한 접근 가능성을 열겠다는 젠더프리 캐스팅의 본래 목적에서 벗어나 여성 배우의 ‘여성성’을 또 다른 방식으로 활용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원종원 교수는 이러한 한계를 뛰어넘어 보다 넓은 범위의 ‘프리(free) 캐스팅’이 시도돼야 한다고 말한다. “기울어진 운동장은 남성과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에요. 외국에서는 이미 성소수자까지 포함하는 진정한 ‘젠더프리’와 인종에도 적용한 ‘컬러프리’도 시도하고 있죠. 이렇듯 평소에 생각지 못했던 문제에 대해 조명해보는 것 또한 문화산업의 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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