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의 거울, 학생자치기구
  • 전규원 기자
  • 승인 2018.11.26 0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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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자치기구
1977년 11월 7일 중앙대 학도호국단 정기검열 및 실기 경진대회가 개최됐다.
1977년 11월 7일 중앙대 학도호국단 정기검열 및 실기 경진대회가 개최됐다.
1988년 3월 24일 민주광장에서 총학생회 발대식이 열렸다.
1988년 3월 24일 민주광장에서 총학생회 발대식이 열렸다.

 

시대에 따라 중앙대 학생자치기구의 활동과 선출 방식은 다양했다. 1945년 첫발을 내딘 학생자치기구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올해 제60대 양캠 총학생회가 임기 마무리를 앞두고 있다. 이번주 백과사전에서는 학생자치기구의 역사를 다뤄봤다.

  학생자치기구의 첫 역사는 중앙대의 전신인 중앙보육학교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5년 9월 29일 중앙보육학교가 중앙여자전문학교로 승격되면서 김인옥(당시 경제 1)이 초대 학생회장으로 선출됐다. 당시 회장과 부회장, 각 부의 부장과 차장은 총회가 제청하고 교장의 인준을 얻어 선임됐다.

  1949년에는 학도호국단으로 학생자치기구가 개편됐다. 학도호국단이란 국방부와 문교부에서 중학생부터 대학생까지를 대상으로 사상 통일과 유사시 향토방위를 위해 조직한 학생단체다. 중앙대 학도호국단 초대 학생위원장에는 홍소운(당시 영문 4)이 선출됐다. 당시 학도호국단 활동은 학예 활동 위주였다.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학생 활동은 학도호국단을 중심으로 한 군사 훈련이 주를 이뤘다. 휴전 회담이 진행되자 학도호국단은 ‘통일 없는 휴전 삼천만의 죽음이다’등을 외치며 휴전 반대 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자 1960년 문교부는 11년간 운영해온 학도호국단을 해체하고 각 학교별 학생자치회 구성을 지시했다. 이에 중앙대도 각 전공단위 대표가 모여 구성한 과도적인 자치회를 선출해 학생 자치활동의 기틀을 다졌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 군사정부는 ‘재건국민운동본부’를 설립하고 각급 학교의 학생회 명칭을 ‘재건학생회’로 개칭했다. 이때 학생회는 백령도 위문공연이나 국제펜팔운동 등 주로 군부대 및 재건국민운동본부와 관련된 활동을 했다. 긴급조치9호 등 정치적 억압이 심화되면서 1975년 학생자치기구는 다시 학도호국단 체제로 재편됐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중앙대 학생자치기구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1979년에는 부산과 마산에서 벌어진 민주화 시위와 10·26사태, 12·12군사 반란 등으로 이어진 숨 가쁜 정치변동이 있었다. 이와 함께 총학생회 재건 움직임도 일어 이듬해 4월 6년만에 직선제를 통해 총학생회장으로 조석제(당시 정외 4)가 선출됐다. 하지만 총학생회 5·17쿠데타의 영향으로 다시 학도호국단 체제로 개편됐다.

  1984년에도 학도호국단 선거가 실시되고 오남성(당시 경영2)이 당선됐지만 ‘총학생회부활 준비위원회’를 중심으로 이를 거부했다. 학내 제반의 민주적 요구와 총학생회 부활 분위기가 조성됐기 때문이다. 이로써 다시 학생자치기구로 총학생회가 부활했다. 1987년 총학생회 선거는 개표과정에서 부정선거로 인해 9명의 선거관리위원이 퇴장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후 법대·문리대·사회대 등 10개 단대 학생회장 중심의 대표자 회의가 선출되지 못한 총학생회를 대신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1988년에는 서울캠과 안성캠의 총학생회를 분리해 선출했다.
1990년대 총학생회 활동은 크게 세 방향으로 진행됐다. ▲학원자주화투쟁 ▲통일운동 ▲총선과 대선기간 반정부투쟁 및 민주후보지지 운동을 실시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 학생회는 보다 학생 중심적인 공약과 활동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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