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500년 동안 27명의 임금은 왕위를 뺏고 빼앗기고, 국권 찬탈의 위기까지 겪으며 다사다난한 역사를 걸어왔다. 이들 중 아들과의 관계에서 비운의 최후를 맞은 인물들이 있다. 바로 사도세자의 아버지인 영조와 광해군의 아버지 선조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비극의 주인공이 돼야만 했을까.

  두 아버지는 모두 왕권의 정통성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제21대 영조는 잘 알려져 있듯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에게서 태어났다. 게다가 그는 단명한 선왕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까지 받으며 조선왕조에서 가장 심각하게 정통성을 위협받은 임금 중 한 명이었다. 제14대 선조의 아버지는 제11대 중종의 일곱째 아들이고 선조는 그의 셋째아들이다. 직계 왕손도 장자도 아닌 그가 임금이 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터다. 실록에는 단지 후사가 없던 선왕 명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기 때문이라고만 기록돼있다. 이후 그는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피난길에 오르면서 나라 안팎으로 위신이 추락한다.

  이들의 정통성 콤플렉스는 부자(父子) 갈등의 주요 원인으로 해석되곤 한다. 정통성이 빈약했지만 노론의 지지에 힘입어 임금이 된 영조는 강력한 탕평책을 추진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사도세자는 노론과 거리를 두고 보다 강력한 탕평 정치를 추구했다. 영조시대 소외됐던 세력이 사도세자에 줄을 서면서 영조와 세자 간의 정치적 대립 구도가 형성된 것이다.

  선조와 광해군의 대립은 임진왜란 발발과 함께 시작한다. 선조가 피난을 떠난 사이 광해군은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 활동을 독려했다. 민심이 광해군을 지지하는 가운데 명나라 황제마저 선조의 국정 실패를 질책하자 선조는 광해군에 극심한 위협을 느낀다.

  두 경우 모두 비극의 희생자는 아들이었다. 사도세자는 임금이 되지 못한 채 뒤주에 갇혀 최후를 맞이했으며 광해군은 어렵사리 왕위에 올랐으나 곧 폐위되고 말았다. 임금과 아버지, 두 개의 왕관을 모두 지키기엔 버거웠기 때문일까. 그들의 이야기는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안타까운 비극 중 하나로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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