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기록입니다. 기록에는 '관점'이 반영될 수밖에 없는데요. 그렇기에 역사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른 관점에서 재해석되기도 하죠. 이번 학기 '후후'에서는 다양한 시선으로 그려지는 역사 속 인물에 주목해보고자 합니다. 이번주 후후의 주인공은 '영조'인데요. 조선의 르네상스를 연 유능한 군주에서부터 제 손으로 직접 아들을 내쳐야만 했던 비운의 아버지까지. 미디어와 대중이 기억하는 영조의 모습을 정말 다양하죠. 역사 속 '인물'의 '뒷'이야기, 영조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조선을 굽어보고 탕평을 열다
연잉군부터 최장 재위 임금까지

“잘하자. 자식이 잘 해야 애비가 산다!” 영화 '사도' 속 영조는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사진출처 : 네이버 영화)
“잘하자. 자식이 잘 해야 애비가 산다!” 영화 '사도' 속 영조는 엄격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사진출처 : 네이버 영화)

  조선 시대 왕 ‘영조’를 떠올려보자. 마른 몸에 하얗게 센 머리, 날카로운 눈빛의 깐깐한 모습은 아닌가? 그러나 그는 어미 소를 따라다니는 송아지를 측은히 여겨 우유로 만드는 타락죽을 잠시 금하기도 하고, 소박한 식단을 즐기며 고추장을 좋아했던 인간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우리에게는 사도세자의 엄격한 아버지와 정조의 자애로운 할아버지로 익숙한 영조, 흔히 알려지지 않은 그의 새로운 모습을 만나 볼 시간이다.

  연잉군의 콤플렉스

  1694년 숙종 20년, 조선의 제19대 임금 숙종의 둘째 아들 ‘이금’이 태어났다. 왕의 아들인 동시에 무수리 출신으로 추정되는 어머니를 둔 왕자였다. 그는 1699년 ‘연잉군’으로 책봉된다. 그의 형은 조선의 제20대 임금 ‘경종’이었다. 경종은 아들이 없었기에 그의 동생 연잉군이 경종의 뒤를 이을 왕세제로 책봉됐다. 몸이 약했던 경종은 약 4년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조선을 통치하다 요절한다. 이후 연잉군은 왕위에 올랐고, 조선을 가장 오랫동안 다스린 국왕 ‘영조’로 살아간다.

  “제가, 왕이 되어야겠습니다.” 드라마 ‘대박’에서는 전략적으로 왕좌를 노리는 연잉군의 모습이 나타난다. 드라마 속 연잉군은 한량인척 하지만 마음속에는 왕좌를 두고 어머니 숙빈 최씨와 왕위를 위한 후사를 도모한다. 영조는 실제로도 연잉군 시절부터 강력한 왕권을 지향한 패기 넘치는 정치인이었을까?

  그는 왕세제로 책봉되기 전 궁궐 밖에서 약 10년간 생활했다. 박광용 명예교수(가톨릭대 국사학전공)가 왕세제 책봉 전 연잉군의 모습을 설명한다. “연잉군은 왕이 되기 전에 궁궐 밖에서 살면서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지낸 시절이 있었어요. 이렇듯 양인(良人)의 생활방식을 가진 시기에는 왕권에 대한 갈망이 표출되기 어렵죠.”

  왕세제로 책봉된 연잉군은 경종 사후 임금의 자리까지 올랐다. 재위 초기에는 ‘이인좌의 난’ 등이 일어나며 왕권의 정당성이 부정되기도 했다. 실례로, 영조는 형인 경종을 독살한 것이 아니냐는 혐의를 받았다. 소론의 지지를 받았던 경종과 반대로 노론의 정치세력을 등에 업고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이처럼 영조는 안정적인 기반 하에 왕권을 차지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어머니의 출신성분은 심적 갈등을 더욱 심화시키기 충분했다.

  영조가 출신성분의 콤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학문에 더욱 매진했다는 견해가 있다. 실제로 영조는 조선왕조 임금 중 경연을 가장 부지런히 한 임금이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그는 신하들과의 경연에서 분위기를 압도할 정도로 많은 책을 읽었다고 전해진다.

 

SBS 드라마 '비밀의 문' 중. 평생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며 강박에 시달린 영조.
SBS 드라마 '비밀의 문' 중. 평생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며 강박에 시달린 영조.

  아버지의 어긋난 진심

  영조가 학문에 매진한 배경에는 출신 성분과 더불어 정책상의 이유도 있었다. 영조는 붕당 간의 대립이 관여된 왕좌에 앉아있었기에 하루빨리 혼란한 정치 상황을 해결하고자 했다. 이에 당파 구분 없이 모든 사람을 고루 등용해 정치적 안정을 꾀하고자 하는 ‘탕평 정치’를 지향했다. 그는 임금이 중심이 되는 탕평의 왕도정치를 펴려면 임금이 신하보다 한 수 위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영조는 자신이 연 ‘탕평 시대’가 후대에도 계승되길 바랐을 것이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 가진 욕심은 사도세자의 아버지로서 가지는 욕심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비극적인 이야기의 바탕이 됐다.

  영화 <사도>에서는 학문과 예법에 있어서 완벽한 왕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영조와 아버지의 기대에 자꾸 어긋나는 아들 사도세자의 갈등이 지속된다. 실제로 영조는 후계자의 교육에도 큰 노력을 기울였다고 전해진다. 탕평은 단기간에 성취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영조의 높은 교육열은 「영조실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영조는 세자의 교육을 위해 직접 「어제상훈」 등의 책을 집필했다. 어느 날 영조는 세자와 관원을 불러들여 말한다. “작년 이달에 내 마음이 바로잡히지 않아 이 훈계를 지어서 원량(*세자)에게 주었었다. 이제 잘 시작한 것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뜻으로 세자에게 시좌하도록 명하고 유신을 불러 이 훈계를 강독하려고 하였는데…”

  자식이 잘되길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은 막상 그 자식에게 부담감으로 다가올 수 있다. 영조의 엄격한 규율은 사도세자에게 압박이 됐다. 아버지는 아들을 꾸짖었고 아들은 아버지를 멀리했다. 계속되는 갈등으로 사도세자는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겪기도 했다. 「영조실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엄격한 아버지 때문에 부담감과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고 한다. 이는 이후 함부로 칼을 휘두르고 궁녀를 죽이는 등 과격한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다정했던 딸 바보

  사도세자와의 갈등이 지속됐지만 영조에게는 일명 ‘딸바보’의 면모가 있었다. 특히 영조는 화평옹주와 화완옹주를 각별히 총애했다고 전해진다. 딸을 너무나도 아낀 나머지 화평옹주가 결혼한 이후에도 궁궐 안에서 살게 할 정도였다.

  「영조실록」에 화평옹주를 향한 영조의 사랑이 드러난다. “임금이 화평옹주의 집에 행행하였다. 옹주는 곧 임금의 둘째 딸로 영빈 이씨의 소생이었다.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는데… (중략) 옹주가 곧 이어 졸하자 임금이 매우 슬퍼하였으며, 빈소에 임어하여서는 통곡하면서 슬픔을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였다.”

  ‘탕탕평평’하게

  영조를 향한 대중의 일반적인 시선은 ‘최고의 왕, 최악의 아버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박광용 명예교수는 그의 사적인 면모만 가지고 악평을 내릴 수 없다고 말한다. “탕평이라는 한 시대의 표방, 곧 한 시대의 분위기를 바꾼 임금이라는 후대의 평가는 쉽게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죠.”

  실제로 영조는 백성을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을 시행했다. 당시 백성이 고통스러워하던 군역 부담을 경감하기 위해 균역법을 만들었다. 또한 가혹한 고문이나 악형(惡刑)을 없앴다. 백성이 억울한 일을 임금에게 직접 알릴 수 있도록 신문고도 부활시켰다.

  입체적인 인물을 평면 위의 기록에 담으려면 한계가 있다. 철저함으로 무장한 개혁 군주와 거친 옷을 입은 소박한 왕은 기록 위에서 같은 이름으로 숨 쉬고 있다. 그렇기에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영조가 한평생 추구했던 ‘탕평’의 시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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