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ie-Antoinette, Elisabeth Vigee Le Brun., 1783.
Marie-Antoinette, Elisabeth Vigee Le Brun., 1783.

역사 속 수많은 인물들이 공을 세우기도 과오를 범하기도 한다. 그러나 유독 ‘민중의 표적’이 되는 인물이 있다. 명성황후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줄곧 비교 대상이 되는 이유다.

  명성황후의 경우 외척 세력을 끌어들여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또한 그는 청과 러시아와 같은 외세를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지탄받아왔다. 사치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마리 앙투아네트는 도박과 밀애를 즐기는 철없고 음란한 왕비로 알려졌다. 두 인물은 오늘날까지도 국가를 몰락에 이르게 한 여인들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토록 비이성적인 모습을 보이게 됐을까. 그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면 두 인물은 모두 불행한 궁중생활을 겪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명성황후는 고종의 냉대와 흥선대원군의 과도한 경계로 인해 왕비로서의 권위를 위협받았다. 오스트리아에서 프랑스로 정략 결혼해온 마리 앙투아네트는 궁중 법도를 제대로 익히지 못했으며 오랫동안 자식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비웃음거리가 되곤 했다.

  명성황후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각자의 방식으로 냉혹한 궁중 생활 속 돌파구를 찾은 것으로 보인다. 명성황후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는 방식을 택했다. 그는 고종의 친정(親政)을 추진해 흥선대원군을 권력의 중심에서 끌어내렸다. 또한 흥선대원군이 그토록 경계하던 외척을 직접 끌어들여 자신의 세력을 키웠다. 한편 주위의 시선과 염문에 의해 고통받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만의 궁전에 숨어 내밀한 사생활을 즐김으로써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시동생과 원정도박을 하고 필요 이상의 사치를 부리기도 했다.

  명성황후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국가와 국민을 대상으로 과오를 남긴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이 역사적으로 과도한 ‘마녀사냥’을 당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는 ‘여성’이라는 정체성이 크게 작용한다. 여성의 타락을 국가의 몰락과 결부시키려는 구시대적 사고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두 인물의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각각 대한민국과 프랑스 대중이 바라보는 명성황후와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시각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명성황후의 경우 그의 정치적 과실에 대해 비판받으면서도 국가 내부적으로 영웅화된 측면도 없지 않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는 명성황후만큼 대중의 동정을 받지 못한다.

  주명철 명예교수(한국교원대 역사학과)는 두 인물의 가장 극명한 차이는 ‘죽음’에 있다고 주장한다. “명성황후의 죽음은 국권을 침탈당한 나라의 비극이에요. 반면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형당한 것은 스스로 민주화의 길을 걸어가려는 프랑스 시민 혁명 과정이었죠. 이것이 두 사람의 차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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