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은 정면에 위치해 주로 드나드는 문을 뜻한다. 서울캠 정문에는 ‘문’이 없다. ‘중앙대학교’ 글자 조형물과 교훈이 새겨진 비석이 길게 뻗은 잔디밭 정면에 자리 잡아 ‘문’을 대신한다. 밤에는 글자 조형물과 그 뒤로 보이는 101관(영신관)에 조명이 켜지고 가로등이 잔디밭을 밝혀 중앙대 대표 야경으로 꼽히기도 한다. 하지만 캠퍼스가 처음부터 ‘문’ 없이 개방되지는 않았다. 서울캠 정문은 시대 흐름과 함께 변했다.

  지난 1970년 7월 담으로 이어져만 있던 중앙대 정문에 기와집 형태의 한옥 정문이 들어섰다. 한옥 정문은 중앙대의 위상과 학교 구성원의 자부심을 높이기 위해 건립됐다. 최철화 동문(행정학과 59학번)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던 기존 정문이 한옥 정문으로 바뀌자 학생들이 좋아했다”며 “청색 기와가 얹힌 정문은 근사했다”고 회상했다. 현재 잔디광장부터 102관까지의 공간인 루이스가든과 정문 사이로 뻗은 진입로가 포장되면서 한옥 정문은 더욱 빛났다. 

  그러나 학생들의 바람과 달리 한옥 정문은 오래가지 못했다. 1980년대 학내에서는 시국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시위가 계속될수록 한옥 정문도 그 모습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김상훈 동문(약학과 82학번)은 “정문을 중심으로 전경들이 안으로 들어오고 학생들이 밖으로 밀리며 학생과 전경 간 대치가 계속됐다”라며 “시위 도중 학생들이 보도블럭을 깨고 던져 기와가 깨졌다”고 말했다. 실제 학생과 전경의 대치 과정에서 화염병이 정문 앞에 떨어져 화재가 나기도 했다.

  대학본부는 각종 시위로 파손된 한옥 정문을 콘크리트 기둥으로 대체했다. 콘크리트 기둥 사이로는 철문이 설치돼 이를 열고 닫을 수 있었다. 지난 1987년에는 반공연맹 회원이 교내에 들어와 집회를 갖자 학생과 전경이 힘을 합쳐 이들을 교내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철문을 닫은 사건도 있었다.

  지난 2002년 10월 중앙대는 더 이상 철문을 닫을 수 없게 됐다. 국내 대학 최초로 정문 담장을 허물었기 때문이다. 당시 서울시는 대도시에 위치해 녹지가 부족한 대학을 중심으로 ‘캠퍼스 공원화’ 사업을 추진했다. 중앙대는 캠퍼스 공원화를 위해 정문 담장을 철거하고 정문과 중문 사이 유휴공간에 산책로를 마련했다. 이 공간은 재학생뿐만 아니라 지역주민들의 휴식 공간이 됐다. 

  교문이 사라진 자리에는 지난 2002년 11월 상징탑이 세워졌다. 동문들의 기부금으로 세워진 상징탑은 높이 22m로 ‘최고’를 상징하는 엄지손가락과 중앙대의 영문 이니셜인 알파벳 C를 상징했다. 하지만 대학본부는 지난 2010년 102관(약학대학 및 R&D센터) 신축 공사로 상징탑을 철거했다. 현재 정문 캠퍼스맵 옆 동판에는 상징탑과 상징탑 건립 당시 기부자 명단을 새겨 기부금을 낸 동문에게 예우를 갖췄다.

  다음해인 지난 2011년 102관이 완공됐으며 차량이 통제된 정문 일부에 잔디광장이 조성됐다. 임소민 동문(영어영문학과 09학번)은 “잔디광장이 학교를 산뜻하고 활기차게 했다”고 말했다. 

  현재 서울캠 정문은 잔디광장을 중심으로 사방이 트여 있으며 중앙대학교 한글 조형물 앞에서 사진을 찍는 학생, 산책하는 지역 주민을 볼 수 있다. 시대와 함께 변화한 정문에 최철화 동문은 “이전에는 담장을 쌓아 외부인을 경계하는 문화가 흔했다”며 “담장을 허물고 전면 개방된 캠퍼스는 중앙대가 지역 사회와 소통하겠다는 의지가 보여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1970년대 한옥 구조의 정문 뒤로 영신관이 보인다.
1970년대 한옥 구조의 정문 뒤로 영신관이 보인다.

 

 

지난 2002년 11월 18일 제막한 정문 상징탑은 ‘최고’를 상징하는 엄지손가락과 중앙대 알파벳 C를 상징했다.
지난 2002년 11월 18일 제막한 정문 상징탑은 ‘최고’를 상징하는 엄지손가락과 중앙대 알파벳 C를 상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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