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시란 왕의 시중을 들던 거세된 남자를 의미한다. 우리가 그동안 콘텐츠에서 마주한 내시는 움츠린 어깨와 구부정한 허리, 간사한 목소리만 강조되곤 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내시는 왕을 보필하고 궁중 업무를 담당했던 중요한 인물이다. 우리가 내시에 대해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는지 확인해 볼 수 있는 깜짝 퀴즈를 마련해 봤다. 지금부터 자타공인 ‘내시 전문가’인 장희흥 교수(대구대 역사교육과)와 함께 그동안 몰랐던 ‘내시’에 대해서 제대로 알아보자.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 등장하는 내시들의 모습.      사진 출처 KBS 구르미 그린 달빛
드라마에 등장하는 내시들의 모습.                     사진 출처 KBS 구르미 그린 달빛


① 내시에게도 아들이 있었을까?

  “너희들의 3대를 멸할 것이야!” 장군의 호통과 동시에 애달픈 음악이 울려 퍼진다. 뒤에 서있던 내시가 토라진 듯 말한다. “제가 3대가 어디 있어요!” 지금은 추억이 된 개그콘서트 코너 ‘감수성’ 콩트 일부다. 과연 내시에게는 정말 3대가 없었을까? 장희흥 교수는 내시도 여느 가정에서처럼 부인과 자녀를 두었다는 사실을 전한다. “내시도 결혼을 했습니다. 다만 신체적 특성상 아들을 낳을 수 없으니 양자를 데려와 키웠죠.” 재산과 권력이 큰 내시의 경우 양자 두세 명을 집안에 데려오기도 했다. 비록 친자식은 아니지만 내시도 이들을 통해 대(代)를 이어간 셈이다.

  또한 장희흥 교수는 내시가 궁 밖에 집을 두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한다. “조선시대 내시의 수는 300명 정도였어요. 궁궐 안에서 다함께 살기엔 무리가 있죠. 이들은 장번과 출입번으로 나뉘어 출퇴근했습니다.” 이처럼 내시는 장시간 왕의 거처를 지키는 장번과 출퇴근하는 출입번으로 나뉘어 교대로 근무했다. 이들은 효자동 일대 궁궐 부근은 물론, 용인과 남양주 등 수도권 전역에 걸쳐 거주했다. 한평생 궁 안에서만 지냈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② ‘고자’라고 모두 내시가 되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내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먼저 고자가 돼야 하는데 중국과는 달리 우리나라 역사에는 죄인의 생식기를 없애는 형벌인 궁형(宮刑)이 없었다. 따라서 선천적인 고자를 포함해 뜻하지 않는 사고를 당한 남자 아이를 내시로 충원했다. 그러나 어려운 가정 형편상 내시로 양성하기 위해 부모가 아들을 거세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고자가 된 남성은 여러 경로를 통해 교육을 받고 궁중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생식 기능을 못한다고 해서 모두 내시가 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내시가 되기 위해선 까다로운 선발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다. 시험은 성불구 여부 검사와 함께 대궐문 이름과 개수, 궁중용어, 내시 금기사항 등 기본 상식 평가로 이뤄져 있었다. 궁에 들어와서도 <대학>을 공부하는 등 소양교육을 꾸준히 받게 되는데 일 년에 네 번씩 소양 시험도 치렀다.

  이밖에도 내시가 되려면 사정없이 물을 먹이거나 나무에 매달기도 하는 혹독한 고문을 거쳤다. 이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궁중 기밀을 발설하지 않는 인내력을 평가하기 위해서 진행됐다. 이러한 과정을 10년간 버텨내야 비로소 정식 내시가 될 수 있었다. 

 

내시는 왕의 충실한 조력자 역할을 했다. 사진 출처 영화 광해
내시는 왕의 충실한 조력자 역할을 했다.                                                           사진 출처 영화 광해

 

③ 목소리가 우람하고 건장한 내시도 있었을까?

  <구르미 그린 달빛>을 비롯한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서 내시는 남성 목소리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장희흥 교수에 따르면 내시는 거세를 하고 난 후 다양한 신체적 변화를 겪는다. “거세한 내시는 여성 호르몬이 분비되면서 목소리가 여성과 유사하게 바뀌어요. 살결이 부드러워지는가 하면 수염도 빠지죠.” 또한 그들은 나이를 먹으면서 여성과 유사한 노화 과정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장희흥 교수는 모든 내시가 이와 비슷한 외양을 지니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실제로는 키가 크고 건장하며 목소리가 우람한 내시도 존재했다.


④ 과연 내시는 조선의 ‘비선실세?’ 

  내시의 임무는 크게 문지기와 궁궐 청소, 왕명 전달과 궁중 음식 감독으로 나뉜다. 그들은 왕실 재산을 관리했으며 궁녀 감독 등 궁정의 다양한 일에도 관여했다. 또한 최측근에서 임금을 모시는 내시는 임금 경호를 도맡을 정도로 무술 고단자이기도 했다.

  이처럼 궁궐 내 다양한 업무를 총괄한 내시가 누리는 특혜와 권력은 상당했다. 기존 콘텐츠에서 다뤄진 내시의 나약하고 순종적인 모습과는 달리 내시는 양반 관료로서 자신감을 바탕으로 강직하고 올곧은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장희흥 교수는 조선시대 내시가 정치적인 권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고 주장한다. “조선은 ‘신하의 나라’예요. 왕도 신하들에게 꼼짝 못하는 구조에서 내시가 왕 뒤에서 권력을 조장하는 경우는 있을 수가 없죠.” 

  내시가 간신이라는 고정관념을 심어준 대표적인 콘텐츠로 장희흥 교수는 1960년대 말에 개봉한 영화 <내시>를 꼽는다. “해당 영화에서 내시는 권력을 통해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간사한 자로 그려져요. 이는 막강한 권력을 누렸던 중국 환관 모습의 연장선이죠. 이러한 이미지가 고착되면서 비교적 최근까지도 잘못 알려졌어요.”

  장희흥 교수는 실제 조선시대 내시의 모습은 ‘임금의 충실한 조력자’에 가장 가깝다고 말한다. “드라마 <대장금>의 ‘상선’과 영화 <왕의 남자>에서 극을 주도한 ‘김처선’이 가장 전형적인 내시의 모습이죠.”


⑤ ‘환관 = 내시’라고?

  우리는 흔히 환관과 내시를 동일한 개념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장희흥 교수는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내시와 환관은 엄연히 서로 다른 존재였다고 말한다. “조선시대 내시는 고려 시대 기준에서 내시가 아닌 환관이었어요. 고려시대 내시는 왕의 측근인 엘리트 집단으로서 거세하지도 않았고 궁중 잡역을 맡지도 않았죠.”

  장희흥 교수에 따르면 고려 말 조선 초에 이르러 내시와 환관의 구분이 사라졌다. 원간섭기 당시 고려의 환관은 원나라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며 권력을 쌓는다. 이후 고려로 돌아온 환관은 내시 직을 차지하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두 개념은 혼용됐다. “「경국대전」이 쓰일 때쯤 되면 ‘환관은 곧 내시’라는 인식이 자리를 잡아요.” 즉 기존에 내시가 담당하던 일을 환관이 맡으면서 서로 의미를 구분할 필요가 사라진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한해서만 ‘환관 = 내시’라는 공식은 성립될 수 있다.

 

내시는 충실한 '왕의 남자'였다. 사진 출처 왕의 남자
내시 김처선은 충실한 '왕의 남자'였다.                                               사진 출처 왕의 남자


왕의 남자 내시

  내시는 왕이 왕비와 궁녀 곁에 둬도 부적절한 관계를 의심받지 않았던 특수한 존재였다. 궁궐 내 살림을 도맡아 했던 내시가 없었다면 궁궐은 제대로 돌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왕의 남자' 내시는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고종 왕조까지 약 천 년의 세월 동안 임금을 보좌해왔다. 그러나 그들은 구한말 일제가 대한제국의 모든 관부를 없애버리면서 조선왕조 멸망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렇듯 내시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우리 역사를 이끌어온 숨은 주인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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