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시’라고 하면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푸른 관복을 입고 등장하는 자들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흔히 ‘내시’라고 통칭하는 ‘환관’은 한국과 중국뿐만 아니라 기원전 페르시아 제국, 그리스와 로마제국, 이집트, 에티오피아 등 세계 곳곳에 존재했다.

  세계 역사상 내시의 활동이 드러난 시기는 기원전 8세기경으로 동양과 서양에서 대체로 유사하게 나타난다. 이에 손준식 교수(역사학과)는 내시의 탄생이 전제군주제의 등장과 함께했다고 말한다. “고대 국가에서 군주는 대개 여러 명의 부인을 뒀어요. 성기능을 못하는 남성이 시중을 들게 해 군주의 불안을 막았죠. 외부 세계와 단절된 내시라는 존재는 군주에 대한 경외감과 신비감을 조성하는 역할도 했어요.”

  다양한 국가에서 내시가 등장한 만큼 거세 방법과 문화 또한 다양했다. 이집트에서는 승려가 거세를 도맡았다. 그들은 음낭을 실로 묶어 칼로 자른 후 뜨거운 기름이나 재로 지혈했는데 이때 사망률이 무려 60%에 달했다고 한다. 인도 남부에서는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거세하되 아편을 사용해 마취를 진행했다. 한편 중국에서는 거세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전문수술공장이 존재했으며 이는 가업으로 이어져 내려왔다고 한다.

  그러나 거세된 내시에 대한 높은 신용도는 여러 가지 폐해를 낳았다. 거세된 내시들은 온전히 믿을 수 있다는 인식 탓에 그들은 생식기능이 있는 남성보다 노예시장에서 더 비싼 값에 거래되곤 했다. 이에 페르시아에서는 내시를 만들어 매매하는 문화가 성행했으며 티베트·미얀마 계통 국가였던 남조국에서는 내시를 만들어 수출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손준식 교수는 내시가 득세해 국정을 어지럽히는 사례도 있었다고 전했다. “중국의 경우 역사적으로 황태후 섭정이 자주 등장해요. 유교 문화상 외간 남성을 상대할 수 없던 황태후는 내시를 통해 정사를 논하곤 했죠. 이 과정에서 내시가 권력을 장악하기도 했어요.” 이렇듯 전제군주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내시는 사회적 약자로 고통 받거나 간신으로 기록되며 역사 속에서 희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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