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우리는 '의'에 죽고 '참'에 산다
  • 공하은 기자
  • 승인 2018.10.08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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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를 향한 분노

혁명의 문을 열다


의혈을 향한 움직임은

오늘도 계속된다


2000년대 이후에도 의혈 중앙인들의 뜨거운 움직임은 계속됐다. 2015년에서 2017년 초반까지 민중총궐기대회와 촛불시위와 같은 굵직굵직한 사건이 중앙대를 뒤흔들었다.
그 중심에는 백남기 동문(행정학과 68학번)이 있었다. 백남기 동문은 지난 2015년 11월 1차 민중총궐기대회에 참가했다가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의식을 잃은 후 지난 2016년 9월 결국 사망했다.

  재학시절 백남기 동문은 지난 1968년 중앙대에 입학한 뒤 위수령에 항거하고 유신철폐 교내시위를 주도하는 등 민주열사로서 남다른 행보를 보였다. 이로 인해 학교로부터 두 차례 제적당한 후 수배를 피하고자 은신 생활을 이어갔다. 은신생활에서 복귀한 후에는 1980년 5월 ‘유신잔당 장례식용 상여’를 준비해 서울역에서 수십만 대학생들과 함께 ‘유신잔당 장례식’을 주도했다. 이명준 동문(신문방송학과 69학번)은 “해당 사건으로 인해 백남기 동문이 군사정부의 눈엣가시가 됐다”고 말했다. 결국 백남기 동문은 1980년 5월 17일 계엄령 포고령 위반 혐의로 징역형을 받고 퇴학당했다.

  1981년 가석방 이후 백남기 동문은 고향으로 돌아가 농민운동에만 전념했다. 그러나 삶은 그를 평범한 농민으로 살게 두지 않았다. 지난 2015년 11월 박근혜 정권이 쌀값을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쌀값이 폭락했다. 이에 항의하기 위해 민중총궐기대회에 참가한 그날 경찰의 물대포가 그를 거꾸러뜨렸다.

  안정배 동문(경제학과 73학번)은 학창시절 백남기 동문에 대해 “평소 후배들에게 다정하고 온화했다”며 “하지만 학생운동에 있어서만큼은 강건한 원칙주의자였다”고 회고했다. 더불어 “귀농 이후 우리 밀 살리기 운동에 힘쓰는 등 생명과 평화를 사랑하는 분이었다”며 백남기 동문의 삶을 기렸다.

  국민들의 분노를 자극한 백남기 동문의 희생은 촛불혁명의 도화선으로 이어졌다. 지난 2016년 9월 드러난 이른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진실 규명과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열렸다. 10월 29일 전국 각지에서 시작된 촛불집회는 탄핵 심판이 진행되기까지 133일 동안 1,500만 명이 넘는 누적 참가 인원을 기록했다.

  정의를 위한 외침엔 중앙대 학생들도 빠지지 않았다. 학내에서 가장 먼저 의혈의 목소리를 한데 모은 단체는 자연대 학생회였다. 제28대 자연대 신지원 학생회장(수학과 13학번)은 자연대 학생회를 필두로 ‘의혈본부’를 구성해 촛불행진을 이끌었다. 지난 2016년 11월 26일 광화문 일대에서 진행된 제5차 촛불집회에는 약 500명의 중앙대 학생이 의혈본부의 이름으로 참여했다.
뒤이어 같은해 11월 3일에는 양캠 총학생회 주도로 ‘중앙대학교 시국선언 낭독 및 촛불집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단대 및 각 전공단위 회장 ▲동아리 회장 ▲양캠 총학생회장 등이 각각의 시국선언문을 발표했으며 800여 명의 중앙대 학생들이 함께했다.

  신지원 학생회장의 뒤를 이어 촛불행진을 이끌었던 제29대 자연대 이인구 학생회장(생명과학과 3)은 “많은 학우들이 분노한 사건인 만큼 집회를 이끄는 구심점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며 “뜻이 있는 학우들과 함께 거리로 나가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어 굉장히 뿌듯했다”며 참여 소감을 전했다.

  1960년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의’와 ‘참’을 실현하기 위한 중앙대 학생들의 노력은 대한민국 현대사의 주축이 됐다. 중앙대 100주년을 맞아 안정배 동문은 “‘중앙대생이 한강을 건너면 역사가 바뀐다’는 전설이 있다”며 “민주주의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한 전통을 앞으로도 잘 지켜나가기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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