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로 이어진 의혈의 흐름

6·3 학생운동부터 
6월 민주항쟁까지

군사독재정권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다


자유당 정권은 물러났지만 완벽한 봄은 찾아오지 않았다. 1961년 5·16 쿠데타로 장면 내각은 집권 1년도 채우지 못하고 붕괴됐다. 당시 중앙대 학생자치회는 5·16지지선언을 발표했다. 4월 혁명 이후 충족되지 못한 기대를 채울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군사정부가 군정 연장을 선언하고 한일협정 비준을 시도하면서 학생들은 점차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1964년 6월 3일 중앙대 학생들은 다시 한강을 건너 광화문에서 박정희 정권 타도 시위에 돌입했다. 박정희 정권은 계엄령을 내렸고 6월 4일에는 휴교령을 선포하기까지에 이른다. 이후 중앙대 학생들은 구속학생석방서명운동을 전개하고 1965년까지 한일 협정 반대 시위를 이어갔다. 또한 3선개헌 반대운동과 유신철폐운동에 참여하는 등 군사독재정권에 대항한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정부는 대학교련을 강화하고 수많은 학생을 연행하거나 강제로 군대에 입영 조치를 내리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까지 계속된 시련에도 의혈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학생들은 전두환 정권 퇴진, 직선제 개헌, 학원과 언론의 자유를 외치며 투쟁을 이어갔다. 홍성범 동문(정치외교학과 85학번)은 “민주광장과 해방광장에서 시위를 주로 진행했다”며 “단대별로 학생총회를 열어 수업 거부를 결의하고 종로나 을지로까지 가두시위를 전개하는 등 열기가 대단했다”고 말했다. 수천명의 학생들이 경찰의 최루탄에 맞서 투석전을 펼치기도 했다.

  특히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은 대학 민주화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다. A동문(신문방송학과 86학번)은 “독재정권에 저항하면 감옥에 가거나 고문을 받고 심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며 “누구나 두려웠겠지만 그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1980년 광주시민을 무참히 살해한 범죄에 대한 분노가 가장 컸다”고 말했다.

  1980년대 초반 거의 모든 언론은 전두환 정권이 통제했고 대학언론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시 중대신문 전직기자회에서 활동한 최영진 교수(정치국제학과)는 “안기부 직원과 경찰이 수시로 신문사에 드나들었다”며 “민주화운동을 보도하지 못한 자괴감으로 퇴사하는 기자, 정부의 압력으로 교묘하게 해고당하는 기자도 있었다”고 말했다. B동문(법학과 82학번)은 “군부독재의 실상을 고발하는 유인물 몇 장을 어렵게 제작하고 구속되기를 반복했다”고 전했다.

  격동의 시국 속에서 중앙대 학생운동은 점차 성장했다. 1984년에는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학자추)가 결성돼 더욱 조직적인 민주화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후 학자추는 중앙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중민추)으로 이름을 바꾸고 활동을 진행했다. 

  1987년 전두환 정권이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며 장기집권 의도를 드러낸 이후에도 대대적인 시위가 발생했다. 중앙대 교수진은 「오늘의 시국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발표했다. 이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이한열 열사 피격 사건이 발생하며 6월 민주항쟁은 그 열기를 더했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6·29 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군사독재정권의 퇴진 이후에도 중앙대는 통일 운동과 광주민주화운동 학살 주범 처단 운동을 이어갔다.

  의와 참 정신은 중앙대 민주화운동의 원동력이었다. A동문은 “중앙대의 교훈은 학생들이 행동하는 상징적 메시지가 되기에 충분했다”고 말했다. 홍성범 동문은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교훈이 가장 자랑스러웠고 타대 학생들도 부러워했다”며 “다만 현재 중앙인들이 그 가치를 실현하는 데 다소 미흡한 것 같아 아쉽다”고 전했다. B동문은 “중앙대가 일상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어떠한 억압에서도 진실을 추구하는 교육기관이 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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