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를 당긴 이내창 열사의 희생
  • 박성배 기자
  • 승인 2018.10.08 02: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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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하지 않은 의와 참의 정신

중앙대를 흔든 안성캠 
총학생회장의 의문사

의혈을 흘리고 
학생을 일깨우다

1980년대는 바야흐로 통제와 억압의 시기였다. 대학에는 사복을 입은 경찰들이 돌아다녔고 전국적인 시위가 이어졌다. 중앙대도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 매진했다. 학생들은 정권 퇴진과 학원 자유화를 외치며 ‘의혈’을 품고 거리에 나섰다. 그러나 6월 민주항쟁 2년 후인 1989년, 당시 안성캠 총학생회장이던 이내창 열사(조소학과 86)의 의문사는 중앙대를 충격에 빠뜨렸다.

  이내창 열사는 1986년 23세의 나이로 중앙대 조소학과에 입학해 조소학과 학생회장을 거쳐 1989년 안성캠 총학생회장이 됐다. 그는 총학생회장 자리에서 학생들과 함께 학생운동에 앞장섰다. 그러나 학교에서 광복절 행사를 진행하기로 한 1989년 8월 15일 거문도 한 해수욕장에서 이내창 열사가 시체로 발견됐다. 정부는 이 사건을 단순실족사라고 발표했다. 단순히 발을 헛디뎌 떨어졌다는 것이다.

  이내창 열사의 사인에 의문을 품은 당시 중앙대 학생들은 학생조사단을 구성해 진상을 밝히고자 했다. 약 200명의 학생들이 거문도를 방문해 이내창 열사의 죽음을 조사했다. 당시 학생조사단과 함께 거문도를 방문한 장임원 전 중앙대 의과대학 교수는 국립과학수사 연구소 부검감정서를 통해 단순 익사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1000여 명의 학생들이 이내창 열사의 시신이 안치된 용산 중앙대 병원으로 평화행진을 했다. 그러나 도중에 경찰의 진압으로 16명이 연행되며 행진은 무산됐다. 하경근 총장 또한 이내창 열사의 사인 규명을 재촉구하는 성명서를 내는 등 정부에 문제를 제기했으나 경찰은 결국 ‘실족에 의한 익사’로 사건을 종결했다.

  학생들은 이내창 열사의 사인이 단순실족사가 아니라 정부에 의한 타살이었을 거라고 주장했다. 1988년 7월 7일 노태우 전 대통령은 민족 통일을 위해 남북이 교류하고 문호를 개방하자는 7·7선언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국가보안법의 범위를 확대하고 학생을 감시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다. 당시 이내창 열사는 안성캠 총학생회 출범식에서 “노태우에 의해 민중생존권이 위태로운 이 시기에 중앙의 의혈학도가 선봉에 서서 노태우를 몰아내자”고 주장해 정부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임수경(한국외대 불어학과)이 평양에서 열린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했다. 이내창 열사가 대의원으로 있던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대표 자격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임수경과 이내창 열사가 정부의 주요 감시 대상이 됐다. 학생들은 이후 이내창 열사가 정부의 표적이 됐으리라 추측했다. 

  이내창 열사의 죽음 이후 학생들은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이내창 사인 진상규명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노용헌 동문(사진학과 88)은 “학생들이 서울 시내 곳곳에서 이내창 열사의 사인과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추모집회를 했다”고 말했다.

  이후 학생들은 ‘이내창 추모사업회’를 구성해 끊임없이 진상 규명과 재수사를 촉구했다. 2000년대 초에는 대통령 산하에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설치돼 이내창 열사의 죽음을 수사했으나 국가기관의 비협조로 별다른 사실을 확인하지 못했다. 이내창 추모사업회는 ‘이내창기념사업회’로 명칭을 바꾸고 이내창 열사를 기리는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이내창 열사를 기리기 위해 중앙대는 1992년 12월 이내창 열사를 의혈탑에 포함하며 7인 추모비를 세웠다. 중앙대의 교훈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누군가는 의에 죽었고 또 다른 이는 참에 살았다. 더 나은 중앙대와 세상을 위해 선배들이 흘린 의혈은 우리의 마음에 의와 참의 정신으로 영원히 기억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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