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사는 인생,

 사회에 가치 있는 일을“

 

 갈라진 인권을 보듬고

 통일의 꿈을 써내다

 

70년간 남북 사이에 놓였던 긴 침묵의 얼음 위에 봄이 찾아왔다. 지난 4월 11년 만에 남한과 북한 각 정상은 손을 맞잡고 휴전선을 통과했다. 70년 만에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고 지난 18일에는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됐다. 통일의 꿈이 다시금 한반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지금 여기, 88올림픽 조직위원회와 통일부 6자회담 한국 대표자를 거쳐 현재는 통일부 북한인권기록센터장을 맡은 서두현 동문(영어교육학과 75학번)이 있다. 한반도에 봄을 가져오기 위해 뛰어온 그의 뜨거운 한평생을 함께 돌아봤다.

사진 최지환 기자
사진 최지환 기자

 

통일부 북한인권기록센터에서 처음 만난 서두현 동문의 모습은 눈이 빛나는 청년이었다. 중앙대 교정을 나선 지 40여년, 통일부에서 일한 지 30년이 됐지만 그는 아직도 의혈을 좇는 20대 중대신문 기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스스로 중앙대의 이름에 먹칠을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는 그의 얼굴에는 중앙대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가득했다. 열정과 사람됨이 묻어나는 따뜻한 눈빛으로 서두현 동문은 반갑게 기자를 맞이했다.

  -최근 남북관계가 개선되면서 감회가 새로울 것 같다.

  “신나죠. 남북관계라는 게 부침이 심하잖아요. 이전까지 남북관계가 단절되거나 긴장, 대립했을 때는 그 시기를 지내기가 힘들었거든요. 통일부 일이 진전이 안 되니까요.”

  -통일부에서 일한 지 30년이나 됐다.

  “맞아요. 통일부가 아이러니한 게 조직 자체가 하루빨리 스스로 없어지기 위해 일하는 조직이에요. 통일되면 통일부 자체가 없어지니까요. 처음 통일부 들어왔을 때는 이렇게 삼십년째 제 직장이 유지되리라곤 생각 못했네요.(웃음)”

  -통일부에서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나.

  “남북관계가 얼어붙었을 때 일이 진전되지 않는 게 제일 힘들었죠. 지난 2011년에는 금강산 관광 독점권을 몰수하겠다는 북한과 협상하기 위해 금강산에 갔어요. 당시 금강산 관광 업무를 담당했거든요. 금강산 관광 독점권을 몰수하겠다는 북한과 협의를 해야 하는데 북한 측에서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거예요. 더 이상 협상을 진행할 수 없어 소득 없이 내려와야 했죠.”

  -앞으로 금강산 관광이 재개될 가능성도 있을까.

  “일단 비핵화 문제가 해결돼야 풀려나갈 여지가 있겠죠. 또 하나는 우리 국민의 인권 문제에 대한 담보가 확실히 이뤄져야 해요. 2002년 당시 금강산 관광이 중단된 이유가 우리 국민이 북한에 의해 총살당해서였으니까요.”

  -업무차 금강산에 자주 갔겠다.

  “금강산 가보신 적 있으세요? 저는 세 번인가 가봤어요.”

  -소문난 대로 절경인가.

  “절경이야 중국 장가계 같은 곳도 있지만 ‘찾아가자 일만이천봉’이라고, 금강산만큼 우리 정서를 가득 품은 산은 없죠. 눈 내리는 초겨울 금강산 야외 온천에 몸을 담그면 물은 따뜻하고 위로 닿는 눈은 시원해요. 잊지 못할 경험이죠.”

  -금강산 외에도 북한에 자주 방문했나.

  “대여섯번 정도 간 것 같아요. 지난 2009년 1월에는 육자회담으로 영변 핵시설을 방문했어요. 영변 핵시설을 방문한 한국 사람은 아마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예요. 핵시설을 지키는 초병도 한국 여권은 처음인지 몇 번이나 여권을 다시 살폈죠. 세 번의 검문을 거친 후에야 통과할 수 있었어요. 아직도 그 초병의 난처해하는 눈동자를 잊을 수가 없네요.”

  -한국 사람으로서는 몇 안 되게 영변 핵시설을 본 느낌은 어땠나.

  “묘한 기분이었어요.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시죠? 약산은 원래 봄이면 진달래꽃으로 덮이는 아름다운 산이에요. 그런데 제가 마주한 1월의 황량함은 달랐죠. 약산을 구비구비 둘러친 구룡강 사이 놓인 영변 핵시설은 사람이 쉽게 접근할 수 없도록 돼 있어요. 강을 건너고 빙 돌아가서야 핵시설에 닿을 수 있었죠. 제가 느낀 황량함을 김소월이 그린 아름다움과 비교하니까 기분이 참 묘하더라고요.”

  처음 중앙대에 입학했을 때 임영신 박사가 단상 위로 올라와 “사랑하는 내 아이들아”라고 입을 뗐다. 중앙대에서 들을 수 있는 임영신 박사의 마지막 입학식 축사였다.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말씀하신 ‘의와 참을 지키라’는 말씀을 그는 잊을 수가 없었다. 입학식이 끝나자마자 중대신문에 입사지원서를 넣었다. 신문이 없어 가져가지 못했던 그 시절 서두현 동문은 중앙대에 의혈의 소리를 전하며 자부심을 키웠다. 그 후 의와 참을 따르겠다는 신념을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켜왔다.

  -처음 중앙대 입학 때부터 통일부에서 일할 생각이었나.

  “아니요. 학부 시절에는 북한 문제를 전공하진 않았어요. 대학원 때부터 사회과학 분야를 전공하게 됐죠.”

  -사회과학분야로 눈을 돌리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

  “중대신문 영향이 컸어요. 중대신문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지금쯤 고등학교에서 영어교육을 하고 있었을 거예요. 원래 전공은 영어교육과였는데 중대신문 일을 하면서 자연스레 사회 문제에 관심이 높아졌죠. 그러다 중앙대 대학원 신문학과에 진학해 정치학 석사를 땄어요.”

  -중대신문에 애정이 많겠다.

  “자부심이 컸죠. 당시에는 중대신문에 대한 관심이 지금보다 엄청 높았어요. 중대신문은 의와 참이라는 창학 정신을 열과 성을 바쳐서 구현하는 무리였으니까요. 신문 나오는 날이면 신문 받으려 사람들이 줄을 서 있을 정도였죠. 신문 제작하기 좋은 시절이었어요.(웃음)”

  -졸업 후에는 바로 통일부에 들어갔나.

  “아니요. 졸업 후에는 자동차 회사 기획실에서 일하게 됐어요. 그런데 하 참, 회사 생활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웃음) 활동적인 신문사 생활만 하다가 기업 기획실에만 앉아 있다 보니 저랑 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러다 마침 중대신문 주간 교수님께 잠시 다른 일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의를 받게 됐어요.”

  -어떤 일이었나.

  “88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에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의였죠. 조직위원회가 교수님께 사회생활을 해봤고 글도 쓸 줄 아는 사람을 추천해달라고 했대요. 교수님께서 저를 연결해주신 거죠. 회사를 그만두고 이후 5년간 88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에서 홍보기획단 업무를 봤어요.”

  -직장을 그만두다니 결심이 컸겠다.

  “고민을 많이 했죠. 사실은 한국사에서 우리가 한이 많은 민족이잖아요. 식민지배를 받은 수동적 객체였는데 88서울올림픽이 한국을 능동적 주체로 전환할 수 있는 좋은 계기라고 생각했어요. 아 어차피 한번 사는 인생, 사회에 기여하는 보람찬 일 한 번 해보자 싶었죠. 물론 앞서 말했듯 직장생활에 회의도 조금 있었지만요.(웃음)”

  -88서울올림픽 후 막막하진 않았나.

  “한시적인 조직위원회였지만 나름대로 어떻게 길이 열리겠지 싶어서 열심히 일했어요. 올림픽이 끝나고 나니까 나름 자부심은 있는데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하게 됐죠.”

  -그 고민의 결과로 통일부에 들어갔나.

  “맞아요. 당시 제가 인생의 중반부 이상에서 중요한 갈림길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했어요. 앞으로 사회를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일이 뭘까 고민했죠. 그러다 ‘통일’이 바로 그 일이라 느꼈던 거예요. 통일부에서 일해야겠다 결심했죠.”

주중대사관 통일관으로 근무시절인 지난 2006년 11월 ‘북경대 국제관계학원 창립 10주년 기념 국제세미나’ 참석 후 윌리엄 페리 前 미 국방부장관과 기념촬영한 모습
주중대사관 통일관으로 근무시절인 지난 2006년 11월 ‘북경대 국제관계학원 창립 10주년 기념 국제세미나’ 참석 후 윌리엄 페리 前 미 국방부장관과 기념촬영한 모습

 

  “돈을 따르려면 사업을 했을 거고, 신앙을 따르려면 성직자가 됐겠죠. 하지만 저는 의혈을 따르고 싶었어요.” 서두현 동문은 40여년 전 대학생 시절처럼 눈을 빛내며 옛날을 회상했다. 중대신문에 들어간 것도, 직장을 그만두고 88올림픽 조직위원회에 들어간 것도, 통일부에서 한반도 평화를 위해 노력한 것도 모두 그 의혈을 따르겠다는 마음가짐 덕분이었다.

  -통일부에 들어온 후 북경대에 유학을 간 계기는 있나.

  “대학원을 다닐 때 미국 유학을 갈 뻔했는데 아쉽게 무산된 경험이 있어요. 이후 미련이랄까 아쉬움이 계속 있었죠. 공무원이 된 후 해외 유학을 갈 기회가 생겨서 이때다 싶어 가게 됐어요.”

  -대학원 당시 미국 유학은 왜 무산됐나.

  “당시 중대신문 주간교수셨던 신문방송학과 최진우 교수님이 저를 좋게 봐주셨어요. 당시 플로리다 주립대 교수셨던 박명수 교수님께 저를 추천해주셨죠. 그런데 70년대 당시 병역을 다하지 않으면 해외에 나갈 수가 없는 거예요.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할 기회가 다른 사람에게 가버렸죠.”

  -그럼 왜 굳이 미국 유학이 아닌 북경대를 선택했나.

“영어교육을 전공했으면서도 중국에까지 유학을 하러 가게 된 계기라면, 88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에서 일할 때의 경험 때문이었죠. 1992년 한중 수교도 하기 전인 당시에 중국팀을 마주하게 됐거든요. 지금에야 중국이 바로 옆 나라기도 하고 교류도 하지만 과거에는 상충된 관계였잖아요. 중국어를 모르니까 중국 분들과 전혀 소통이 안 되는 거예요. 아, 중국이 알고 보니 이렇게 가까운 나라였구나, 중국어를 배워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러다가 통일부에서 일하게 되면서 중국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더욱 굳혔어요.”

  -통일부 업무가 중국과 관련돼서인가.

  “맞아요. 통일부 일을 하며 중국과의 관계가 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중국의 입장과 태도가 통일 문제에 하나의 산소 같은 느낌이잖아요. 그래서 중국에 대한 적응력을 키워 한반도 통일에 기여하겠다고 결심했죠.”

  -통일부에서 일을 하면서 북경대 입학을 준비한건가.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중국어 학원에 다녔어요. 국제관계학원을 준비하다 보니 국제관계에 대해 중국어로 길게 논하는 공부도 병행해야 했죠.”

  -힘들지는 않았나.

  “힘들었죠. 시험을 16일 남겼을 즈음 더 이상 못하겠다 싶었어요. 포기하려던 그때 아내가 갑자기 16일을 초로 계산해보라 말했죠. 16일을 초단위로 세면 1382400초로 엄청나게 긴 시간이라고요. 이만큼 시간이 남았는데 지금 포기하긴 이르다, 끝까지 달려라. 그런 아내의 격려를 듣고는 다시 혼신을 다해 공부했어요.”

  -결국 북경대 국제관계학원에 유학생 중 수석으로 입학했다.

  “하늘이 도왔죠. 학교에 다니면서는 뜻하지 않게 교육부에서 주는 유학생 성적 우수 장학금도 받았어요.” 

지난 2001년 3월 15일 통일부 근무시절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사무실에서 북측 대표와 만나 분단이후 최초의 남북이산가족 편지교환을 하고 있다(왼쪽에서 두번째)
지난 2001년 3월 15일 통일부 근무시절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사무실에서 북측 대표와 만나 분단이후 최초의 남북이산가족 편지교환을 하고 있다(왼쪽에서 두번째)

 

  “북한 동포들이 남쪽에서 공부도 하고, 간단한 수술도 받고, 취업도 하고, 여행도 오는 거예요. 서로 자유롭게 오갈 수만 있다면 사실상 통일이지 뭐예요. 저는 북한의 거주이동 자유 문제가 가장 긍정적이고 중요한 인권 문제라고 생각해요.” 북한과 자유롭게 오갈 미래를 상상하는 그의 눈빛에는 통일을 향한 희망과 꿈이 빛났다. 인터뷰 도중에도 수없이 업무 요청에 시달렸지만 그는 전혀 힘든 기색이 없었다. 30년의 세월을 통일이라는 목표 하나만 바라보며 통일부에서 달려왔다. 아직도 그는 북한의 가장 어두운 구석까지 보듬고 기록하는 일을 하며 통일의 꿈을 빚어내고 있다.

  -제1대 북한인권기록센터장을 맡았다.

  “책임이 무거워요. 북한인권기록센터는 북한 인권법이 가까스로 통과되면서 지난 2016년 만들어진 신생 조직이에요. 국내외로 관심이 높다 보니 부담감이 컸죠.”

  -북한인권기록센터는 어떤 일을 하나. 

  “북한의 인권 문제를 정부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조사해서 공식 기록물로 남기는 기관이에요. 이전까지는 민간이나 NGO 차원에서 조사하곤 했는데 이제 정부가 사실관계를 파악해서 기록하는 거죠.”

  -인권 문제 조사는 어떤 방식으로 이뤄지나.

  “원래 인권 조사는 북한에 직접 가서 해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죠. 그래서 하나원에 들어온 교육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해요.”

  -인권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원칙이나 신념이 있나.

  “북한인권기록센터의 역할은 단순한 사실 기록에 그치지 않고 피해자분들의 상처를 보듬고 마음을 치유하는 거라 생각해요. 특히 조사대상 탈북민의 80%가 여성인데 인권 침해 사실을 마음에만 담아두셨던 경우가 많아요. 이런 분들이 피해사실을 털어놓으시며 마음의 짐을 더실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죠.”

  -가장 많이 들어오는 피해 사레는.

  “구금시설에서 신체적 침해를 당한 경우가 많죠. 감옥, 유치장 이런 데서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다든지 하는 사례요.”

   -관련해서 일화가 있다면.

“탈북하신 여성 한 분이 피해 사실을 털어놓으시면서 눈시울을 붉힌 적이 있어요. 처음엔 주저하시다가 말씀을 마치신 뒤에는 ‘남쪽에 와서 다 털어놓고 나니까 참 마음이 후련하다’ 하시더라고요. 우리 인권센터가 피해사실을 기록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피해자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효과도 있구나 싶었죠.”

  -인권 조사 중 예민한 사안이 많겠다.

  “그래서 조사의 원칙을 세우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인권 조사라는 게 우리가 임의로 막 하는 게 아니라 국제적인 인권 기준이 있어요. 인권센터 초창기에는 해당 기준을 따라 유엔이나 전문가와 협의해 저희 원칙을 세우는 데 집중했죠.”

  -초반에 노력이 많이 필요했겠다.

  “검사, 변호사 등 여러 법률 경험이 있는 저희 직원들이 헌신적으로 노력해줬죠. 이제는 유엔이나 외국 손님들이 많이 와서 ‘한국의 북한 인권조사 업무가 체계적으로 잘돼있다’고 칭찬해 주세요. 그럴때마다 뿌듯하죠.”

  -북한과 관계가 좋아지면서 인권기록센터가 제 역할을 못할 거라는 예측도 있다.

  “북한인권이라는 주제는 남북관계가 단절돼있을 때 더 돋보여요. 지금처럼 남북정상회담 같은 큰 그림이 증가할 때는 상대적으로 북한 인권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것처럼 보일 수 있죠. 북한과 관련해서 생산되는 뉴스들이 큰 회담 위주가 많다 보니 사회적으로 북한 인권 문제가 작게 비춰질 수밖에 없거든요. 그러나 인권은 보편적 가치기 때문에 북한인권기록센터나 정부의 목표에는 변함이 없어요.”

  -30년 동안의 공직생활을 큰 부침 없이 보낼 수 있었던 비결은 뭐라고 생각하나.

  “사회에 뛰어든 후부터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교훈을 늘 제 교리로 삼았어요. ‘의’라는 건 정의를 의미하고 ‘참’이란 건 진리를 추구하는 거잖아요. 진리를 추구하면서도 정의로운 삶을 살자는 이 교훈은 우리 삶에서 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해요.”

 

당신에게 중앙대란?

“오늘날 제가 이 자리에 올 수 있게 한 삶의 원동력이자 요람, 도약대죠. 제가 이룬 모든 일이 중앙대를 빼놓고는 성립될 수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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