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는 술에 취할 때마다 “삼봉이 아니면 내가 어찌 오늘 이 자리에 있을 수 있겠는가”하며 정도전에게 조선 건국의 공을 돌렸다고 전해진다. 삼봉 정도전(1342~1398)은 국호를 정하고 경복궁을 비롯한 서울 도심을 설계한 조선 개국 공신이다. 그는 왕조의 기틀을 다져놓은 군자지만 태종 이방원에 의해 만고역적으로 낙인찍혀 역사 뒤편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오랜 시간 잊힌 그가 재조명받은 건 비교적 최근이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 <정도전>, <육룡이 나르샤>를 통해서다. 다시 정도전을 만나볼 시간이다.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한 장면. 유생과 백성 무리가 권문세족 사병들에 둘러싸인 상황에서 정도전(김명민 분)이 백성의 한을 토해내듯 ‘무이이야’를 부르고 있다. 사진출처 SBS 육룡이 나르샤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 한 장면.  유생과 백성 무리가 권문세족 사병에 둘러싸인 상황에서 정도전(김명민 분)이 백성의 한을 토해내듯 ‘무이이야’를 부르고 있다.                                           사진출처 SBS 육룡이 나르샤

백성 중심 개혁을 시도하다


  고려 말은 나라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백성은 송곳 꽂을 땅 하나 없는 반면, 권문세족의 토지 크기는 산천을 경계로 삼을 만큼 컸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홍건적과 왜적 침입이 잦아 백성이 고통받는 시절이었다. 젊은 시절 유배 생활을 한 정도전은 유배지에서 백성의 참담한 현실을 마주한다. 큰 사람이 되기 위해선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했다. 유배 시절 민생의 어려움을 직접 보고 겪은 그는 이후 민본사상과 위민정신을 주장하는 혁명가로 거듭난다.


   정도전은 신진 사대부 출신이다. 그는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백성을 위한 정책을 추진한다. 먼저 민생과 가장 맞닿은 토지 제도를 개혁한다. 개인과 관청이 가진 모든 토지 문서를 몰수하고 국가에서 직접 토지를 재분배하도록 한다. 또한 민생 안정 대책으로 세금을 삭감한다. 나아가 그는 교육, 형벌, 군(軍) 제도 등 통치 방향을 정립하며 조선 왕조의 기틀을 마련한다. 

  
    조선 왕조 설립은 단순히 왕(王)씨 왕조에서 이(李)씨 왕조로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 정도전은 ‘재상 중심 정치’라는 완전히 새로운 체제를 설계한다. 재상 중심 정치란 임금이 아닌 양반관료들이 이끄는 정치다. 훌륭한 재상들이 임금을 올바르게 인도해 국가를 운영하는 방식이다. 이를 위해 그는 과거 제도를 강화해 신분보다 실력이 높은 인재를 등용하고자 한다. 


   박경하 교수(역사학과)는 정도전을 시대적인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 개혁 정치가로 평가한다. “정도전은 소수 귀족에 의해 통치됐던 국가를 다수의 재상이 이끌어가는 정치 체계로 바꾸고자 했어요. 중세 질서를 깨고 민본사상과 신분적 개방성이라는 근세 질서로 한 걸음 나아갔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죠.”

 

드라마를 통해 재해석된 정도전


  정도전을 주요 인물로 다룬 드라마에는 <육룡이 나르샤>와 <정도전>, <뿌리깊은 나무> 등이 있다. 각 드라마는 정도전을 어떻게 보여주고 있을까. <육룡이 나르샤>에서 정도전은 강한 집권 욕망을 드러내는 이방원과 대비돼 윤리적인 명분을 강조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한 발짝 뒤에서 국가의 틀을 설계한다. 


   정도전의 정치 철학은 드라마 초반부 노래 ‘무이이야(無以異也)’를 부르는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무이이야는 ‘다른 점이 없다’는 뜻으로 칼로 사람을 죽이는 일과 정치로 사람을 죽이는 일이 다르지 않다는 의미다. ‘사람을 칼로 죽이는 일과 정치로써 죽이는 일이 다른 점이 있겠는가’ 하는 맹자 질문에 대한 양혜왕의 답으로 전해지는 구절이다. 원과 전쟁을 막기 위해 모인 정도전과 유생 무리는 이 노래를 부른다. 백성을 근본으로 여기는 정도전의 위민사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드라마 중반부 온건 개혁파 정몽주는 역성 혁명파 정도전을 회유한다. “고려의 틀 안에서 개혁하세.” 정도전은 반문한다. “귀족을 해체하고 성리학을 바탕으로 나라를 세워야 합니다. 그들을 처리하지 않고는 개혁할 수 없는데 왜 고려여야만 합니까.” 이를 ‘반역’이라 말하는 정몽주에게 정도전은 말한다. “시작의 지점에는 언제나 모순이 있는 겁니다.” 그의 ‘도전’ 정신과 담대함이 느껴진다. 


    <정도전>은 올바른 명분을 바탕으로 개혁을 단행하는 정치인 정도전의 면모에 주목한다. 드라마는 지도자의 성장과 깨달음을 담는다. 이영미 교수(성공회대 겸임교수)에 의하면 <정도전>은 그를 현실적인 정치성과를 위해 비(非)윤리를 감행하기도 하는 인물로 묘사한다. “정도전은 스승과 친구들을 숙청하고 정치적 술수를 마다하지 않죠.”  


   한편 <뿌리깊은 나무>는 세종 시대가 배경이다. 정도전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재상 중심 정치라는 정도전의 뜻을 잇는 비밀조직 밀본이 나온다. 밀본은 드라마에서만 등장하는 허구적 설정이다. 이영미 교수는 이를 세종과의 대결 구도를 위한 작가의 장치로 설명한다. “이 작품에서 밀본의 정치 철학은 ‘백성 중심 정치’를 구현하려는 세종에 맞서는 ‘엘리트 전문 정치인 중심 정치’로 묘사됩니다.” <뿌리깊은 나무>는 정도전에 대해 앞선 두 작품과는 또 다른 시각을 보여준다.  
 
정도전에게 배우다


 정도전은 이전까지 이성계와 이방원, 정몽주에 비해 크게 주목받지 못한 인물이다. 그랬던 그가 미디어를 통해 다시금 주목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영미 교수는 이를 대중의 욕망과 연결지어 설명한다. “드라마가 방영된 당시는 박근혜 정부 시기였어요. 개혁적인 정치를 결단력 있게 실행하는 지도자에 대한 당시 대중의 갈망이 정도전을 재조명시킨 거죠.” 


   시나리오론 관점에서도 정도전은 매력적이다. 그는 귀양살이 후 조선 건국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며 난세 속에서 성장해간다. 그러나 그에겐 숙청이라는 ‘위험’과 이방원이라는 ‘장애물’이 존재한다. 또한 작가는 정도전의 삶을 통해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이렇듯 정도전은 스토리 5요소(주인공, 목표, 위험, 장애물, 주제의식)를 골고루 갖춘 흥미로운 인물인 셈이다. 


   한편 박경하 교수는 팩션 드라마의 한계를 말한다. “현대적 가치관이 들어있는 드라마는 어디까지나 드라마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책을 통해 제대로 공부해야 하는 이유죠.” 

 

  정도전은 시대 변화를 읽어냈다.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의 문물제도를 만들고 왕조 기틀을 다져놓았다. 김인호 초빙교수(광운대 교양학부)는 우리가 정도전에게 배워야 할 점으로 창의성과 혁신적 사고를 꼽는다. “정도전이 지향한 근본적인 개혁은 기존의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사고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역사는 살아있는 자에 의해 쓰인다 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가 그에게 배울 점은 또 무엇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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