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불망기
  • 이수빈 기자
  • 승인 2018.06.05 18: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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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가 그랬다. 길 위의 가로등 하나에서도 문제의식을 찾을 수 있다고. 그 만연한 것들을 이끌어다 기사를 쓰라고. 어리바리는 그날 각성했다. 주위를 기억하려 참 애썼다. 그의 휴대전화 속 사진첩을 보면 알 수 있다. 캠퍼스에 붙은 작은 딱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찍어두었다. 어리바리는‘기억에 대한 욕구’가 강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인간을 망각의 동물이라 부른다. 그만큼 인간은 쉽게 잊고 지우며 살아간다.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아픔을 마주해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는 것처럼. 게다가 스트레스가 심하면 기억력이 감퇴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더라. 안타깝게도 어리바리는 스트레스에 취약했다. 의도치 않게 꽤 소중하다 여겨왔던 기억을 까먹기 일쑤였다.

  그는 자신이 망각하는 순간 드러내야 할 음지의 이야기가 묻혀버릴까 두려웠다. 그래서 더듬이를 세웠다. 기억에 대한 욕구를 키웠다. 마주한 세상을 계속 곱씹었다. 기록했다. 취재했다. 생각했다. 기사를 썼다. 보도했다.

  이렇듯 기자가 2년 6개월 동안 적어낸 기사 하나하나는 소수자와 피해자의 아픔을 잊지 않겠다는 불망기였다. 진실이 어둠에 묻히지 않도록 적고 또 적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를 빌려 마지막 불망기를 남긴다.

  이번학기 중대신문은 구성원의 용기 있는 목소리 덕에 여러 학내 성폭력 사건 및 의혹들을 보도하고 공론화할 수 있었다. 중앙동아리 소속 A학생, 일본어문학전공 A교수, 전 문화연구학과 A강사, 전 경영학부 A교수, 전 카우몰 점장, 전 조소전공 A강사. 일련의 사태들을 망각하지 않도록 꼼꼼히 취재하고 기록했다. 사건이 공론화되자 수많은 A는 강의에서 배제됐고 검찰에 송치됐고 파면 권고를 받았다.

  때로 시간이 약이라며 망각으로 치유를 시도하는 사람도 많다. 그들은 아프지 않으려고 '망각에 대한 욕구’를 키운다. 그러나 어떤 부분에서 망각은 아무것도 치료하지 못한다. 오히려 의미 있는 목소리를 사라지게 만든다. 망각하는 순간, 다친 이의 상처는 더 깊숙하게 곪아버린다. 또 아직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를 음지로 숨게 한다. 경각 없이 망각으로 버무려진 사회는 또 다른 피해자가 만들어져도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그러니 기록해야 한다. 여전히 저 음지 아래에는 위로 올라오지 못한 성폭행, 성희롱, 성 고정관념, 성차별들이 만연하다. 성폭력 사건들은 끝까지 파고들고 관심을 줘야한다. 그러지 않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꼬리를 자르고 도망치는 도마뱀처럼 숨어버린다. 도망친 도마뱀은 저 깊숙한 곳에서 다시 본인의 꼬리를 키운다. 그리고 그 꼬리로 다시 누군가를 쿡, 찌르고 쑤시고 상처 낸다.

  망각이 무서운 기자는 이 지면 한 자락 찢어 독자에게 마지막 불망기를 건넨다. 당신의 목소리를 잊지 않을 것이며 경각을 잃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그리고 후배들에게 앞으로의 불망기를 부탁한다. 앞으로도 더듬이를 곤두세우고 소수자와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기록해주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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