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비평 공모 영상비평 부문 당선작
  • 중대신문
  • 승인 2018.06.04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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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해선 학생(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2) 「우리는 분노해야 하는가?」-쓰리빌보드가 가져오는 고찰-

영화와 시대는 오랫동안 서로 말을 주고 받아왔다. 1987년이란 항쟁의 시기가 영화가 되고, 영화 속 내부자들이 실제의 세상에서 판치기도 한다. 이런 상호작용을 보여주듯,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유독 사회적 약자들에 관한 작품들이 많이 보인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약자들의 연대와 사랑을 보여주며, <겟 아웃>은 백인 사회가 답습하는 편견이 흑인 사회에서 어떻게 공포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준다. 여전히 존재하는 미국 사회의 편견과 악습에 대해 미투운동과 같이 이를 ‘타개’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화되는 지금, 영화들은 이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제시한다.

  <쓰리 빌보드>도 같은 기류를 탄다. 이 영화는 편견에 맞서는 사람들을 아름다운 투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과격한 방법으로 그려내며, 문제의 ‘타개’에 관한 방법론적 고찰을 유머러스하게 드러낸다. “내 딸이 죽어가면서 강간당했다.” “근데 아직도 범인을 못잡았지.” “어떻게 된 건가, 윌러비 서장?” 살해당한 딸의 엄마인 밀드레드가 이 세 줄의 도발적인 문구를 마을 외곽의 세 개의 대형 광고판에 걸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딸의 살인사건에 대한 관심이 세상의 관심이 식어가고 경찰은 수사에 진전을 보이지 않자, 그녀는 이런 획기적 방식으로 관심을 끌고, 경찰에 비판을 가한다.

  독특하게도 <쓰리 빌보드>는 사건의 수사 자체에는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오히려 남편과 이혼하고 홀로 아들을 키우는 여성 밀드레드가 마을의 신임을 얻는 경찰서장인 윌러비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면서 닥치는 일들을 조명한다. 또, 이를 그저 세상에 맞서는 한 분노한 여성의 감동적인 이야기로 다루지 않으며, ‘분노’의 의미에 대해 다각적으로 고찰한다. 감독인 마틴 맥도나는 그만의 독특한 문법으로, 시대의 화두인 문제의 타개 즉, ‘투쟁’에 관해 고찰한다. 이 때문에, <쓰리 빌보드>를 사회 구조적 측면에서 본다면, 사회 시스템 속 ‘투쟁’은 복합적인 위치를 가진다.

  작 중 3명의 인물, 살해당한 딸의 엄마인 밀드레드, 인종차별과 편견이 가득한 경찰인 딕슨, 마을의 신임을 얻는 서장인 윌러비는 각각 개성을 지닌 이야기의 중심축이면서도, 톱니바퀴로서 사회의 작동원리를 보여준다.

  먼저 밀드레드는 세 개의 광고판으로 경찰을 도발한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의 낡은 체계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진보적 가치를 담고 있다. 윌러비 서장이 자신의 암 투병 사실을 그녀에게 알릴 때도, 냉정함을 유지한 채 “징징대지 말라”고 훈계한다. 그녀가 자주 입는 붉은색 내의와 푸른색 점퍼슈트처럼 밀드레드는 내면의 분노를 차갑게 드러낸다. 그녀는 낡은 체계에 냉정하게 분노를 표하는 진보적 이념으로 볼 수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를 색채로 시각화한 것인데, 붉은색 광고판과 붉은색 내의 등 여러 디테일을 붉은색으로 표현함으로써 추상적으로 그녀가 혁명적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딕슨은 밀드레드와 대립각을 세우는 인물로, 흑인을 고문한 이력이 있고 민간인에게 폭력을 서슴지 않고 행사하는 경찰이다. 그는 사회의 오래된 편견과 악습을 그대로 답습하는 잘못된 보수적 관념을 담고 있다. 만화를 보며 나태하게 업무를 보는 등 낡은 사회의 단점을 그대로 드러내는 인물로 볼 수 있다. 딕슨은 밀드레드에게 비아냥대며 서장을 비롯한 경찰에 대한 비판적 광고판에 대해서 큰 반감을 드러낸다. 또, 자신들을 비판하는 광고를 실었다는 이유로 광고사 직원인 레드 웰비에게 무력을 행사하려 하는데, 이런 행위들은 권력 질서를 강요하는 잘못된 관념을 드러낸다.

  작 중 딕슨은 마마보이로, 상당히 어린 인물로 그려진다. 그가 어린 인물로 설정된 것은 ‘어린’이 ‘어리석은’이라는 단어에서 비롯된 것처럼, 그가 가지고 있는 편견과 관념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드러낸다. 밀드레드는 이런 딕슨을 “엄마한테 나가’라는 등 종종 어리다고 무시한다. 두 인물은 모두 ‘분노’를 자주 표하는 데, 딕슨의 비이성적인 분노에 비해 밀드레드의 분노는 상대적으로 정당한 분노로 비춰진다.

  윌러비 서장은 이 두 인물을 조율한다. 그는 밀드레드의 분노에 대해서 이해를 하려고 하는 한편, 딕슨의 행동을 지적하기도 한다. 윌러비는 경찰서라는 사회의 체계를 조정하고, 마을을 유지시키는 하나의 시스템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보수의 가치를 안고 있는 낡은 사회의 시스템이다. 밀드레드에게 “인종 차별을 하는 경찰을 빼면, 남는 경찰은 3명 밖에 없다”는 말을 하며, 경찰서 안의 뿌리 박힌 편견을 알고 있지만 서장으로서 그에 대한 쇄신을 하려 하지 않는다. 또, 딕슨을 때로는 보호하기도 하는데, 이는 사회의 낡은 시스템은 부조리를 인지하면서도, 그들의 잘못된 관념을 포기하지 않으려 함을 보여준다. 이런 맥락에서 그가 암 투병 환자인 것은, 사회의 시스템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순회 되지 않으면서 스스로 망가져 가는 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사회적 시스템은 오랫동안 견고하고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시스템에 익숙해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지지한다. 많은 마을 사람들은 윌러비 서장이라는 오래된 시스템을 신뢰하고 그의 편에 선다. 치과의사나 목사 같은 윌러비의 지지자, 즉 시스템의 적극적 변화를 꺼려하는 사람들은 밀드레드를 무시하거나 타이르는 식으로 그녀에게 광고판을 내리도록 압박한다. 밀드레드는 목사를 갱단에 비유하며 그 역시도 결국 한패라는 식으로 말을 하는 데, 이는 진보적 가치를 거부하는 것은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결국 보수적인 사회 전체라는 것과 같다. 밀드레드가 치과의사의 엄지손가락을 망가뜨리는 것도, 변치 않는 사회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라 볼 수 있다.

  윌러비 서장은 결국 밀드레드의 딸의 살인 사건에 대해서 재조사해 보기로 한다. 즉 오래된 시스템은 스스로의 변화를 꾀한다. 하지만, 이미 시간이 많이 경과했고, 수사에는 어떠한 진전도 발생하기 어렵다. 이미 낡아 버린 체계에서의 변화는 이렇게 실패해버린다. 그다음 장면에서 윌러비 서장은 피를 토하는데, 이는 곧 낡은 체계의 종말이 다가옴을 예고하는 것이다.

  중반부까지의 전개에서는 밀드레드의 분노가 반발을 많이 사긴 하지만, 상당히 정당한 분노로 비춰진다. 또, 낡은 체제와 편견에 대해 홀로 싸우며 체제를 변화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듯, 밀드레드가 표하는 분노는 딕슨의 분노보다 상당히 이성적이고 나은 것처럼 묘사된다. 이런 대목에서 자연스럽게 관객들은 결국 사회 잘못된 인식의 타개를 위해 우리는 분노해야 하는가 하는 인식을 가지는데, <쓰리 빌보드>의 진정한 고찰은 여기서 시작된다. 과연 분노가 답인가? 감독인 마틴 맥도나는 아주 영리한 방식으로 분노에 대한 다각적 관점을 제시한다. 바로 진보와 보수적 관념의 분노가 충돌하던 지점을 조율하던 사회 시스템을 망가트리는 것이다. 완충제가 없어진 시점부터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분노는 새로운 맥락을 맞이하게 된다.

  윌러비 서장의 선택은 ‘자멸’이었다. 암 투병 중이던 그는 고통을 덜고자, 스스로를 망가트리는 선택을 한다. 이는 속에서부터 앓고 있던 낡은 시스템은 변화를 추구하지만, 이에 실패하고 자신의 종말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낡은 시스템은 자신이 앓고 있던 문제들로 망가져 버린 것이다.

  이런 낡은 시스템의 지지자들은 원인에 대해 성찰하지 않는다. 견고했던 자신들의 시스템을 그들이 시선에는 과격한 외부의 진보적 가치가 망가트린 것으로 여긴다. 딕슨은 윌러비 서장에 대한 복수를 하겠다며, 광고사 직원인 레드 웰비를 창밖으로 던지고 두들겨 팬다. 또, 마을 사람들은 밀드레드에게 그녀의 차에 계란을 던지기도 하며, 차가운 시선을 보낸다. 의문의 괴한은 자신이 윌러비의 열렬한 지지자라며, 그녀에게 폭력을 행사하려 한다. 밀드레드는 의도와 달리, 마을 사람들에게는 그녀가 윌러비를 죽인 셈이 된 것이다. 하지만 윌러비의 편지에서 드러나듯, 사실 그녀의 광고판은 서장의 죽음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시스템의 붕괴는 외부의 저항이 아닌 내부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스템의 갑작스러운 붕괴는 유지된 분노의 균형에 균열을 일으킨다. 딕슨의 과격함은 절정에 다다르고, 마을 사람들과 밀드레드의 갈등은 고조된다. 급기야 그녀가 세운 광고판은 누군가에 의해 방화된다. ‘분노’라는 감정이 ‘불’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극대화됨을 보여준다. “분노는 분노를 낳는다.”는 말처럼 밀드레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그녀는 광고판의 방화에 분노해, 경찰서에 화염병을 던진다. 각자의 비이성적 면모를 보이는 분노는 맞물리면서 클라이맥스로 몰고 간다.

  분노는 이제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쓰리 빌보드>의 고찰은 바로 여기서 드러나는 데, 분노를 다각적으로 관찰한 것이다. 진보의 가치를 지닌 인물이 낡은 사회의 편견에 향하는 분노는 정의로워 보이는데, 과연 이 분노를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딕슨에 비해 냉정한 모습을 보여주던 밀드레드의 분노가 과연 이성적일까? 아니 애초에 ‘이성적’ 분노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항상 냉정해 보이던 밀드레드 마저도 불완전한 인간이다. 그녀는 자신의 딸에게 악담을 서슴지 않고 뱉어대며, 편견에 저항하는 그녀도 난쟁이에 대한 편견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또, 그녀는 경찰서에 화염병을 던지기 전에 전화를 걸어 사람이 없는지를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모르던 ‘딕슨’은 그녀에 의해 화상을 입게 된다. ‘분노’라는 성질은 애초에 태생적으로 불완전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분노가 ‘응징’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면 ‘딕슨’이란 인물이 화상을 입는 모습을 처참하게 보여주지 않았을 것이다. 딕슨은 바로 밀드레드가 저항하는 사회적 편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만약 분노가 그저 ‘응징’이었다면 이 장면은 밀드레드의 극적인 승리로 그려냈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화상을 입은 딕슨의 모습은 진보적 가치의 분노가 승리하는 모습이 아닌, 그 분노가 예상치 못하게 가져오는 비극성을 드러낸다.

  작 중 윌러비 서장의 말처럼 분노가 모든 것을 해결하지 않는다. 밀드레드가 그토록 저항하던 사회적 편견인 딕슨을 바꾼 것은 분노가 아닌 ‘이해’와 ‘용서’였다. 윌러비 서장이 편지를 통해 딕슨은 더 나은 인물이 될 수 있다고, 그를 이해하자 딕슨은 그제서야 밀드레드 딸의 사건 수사일지가 불에 타는 것을 막기 위해 일지를 품은 채로 불구덩이를 헤쳐 나간다. 또, 그가 창밖으로 던져 중상을 입은 광고사 직원인 레드 윌버와 같은 병실에 입원했을 때, 레드 윌버는 그에게 복수 대신 오렌지 주스를 건넨다. 이 \때, 딕슨은 후회와 반성의 눈물을 흘린다. 사회의 편견을 바꾼 것은 바로 ‘이해’였다.

  밀드레드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난쟁이와의 식사 자리에서 우연히 전남편을 만나자 부끄러워하며, 그녀가 그토록 증오하던 세상의 편견을 어느새 난쟁이에게 가하고 있었다. 난쟁이의 말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결함을 ‘이해’한다. 그 후, 그녀가 전남편을 찾아가 휘두른 건 폭력이 아닌 진정한 충고였다.

  극이 결말을 향해갈수록 과연 분노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가에 대한 대답은 ‘그렇지 않다’에 가깝다. 각각 분노를 표하던 진보적 가치와 사회적 편견이 가득한 분노 적 가치 중에서 어느 것이 정당한가라는 질문은 더 이상 무의미해졌다. ‘분노’는 날카로운 검으로 잘못 스치기만 해도, 상대에게 큰 상처를 안긴다. 오히려 진정한 편견을 깬 것은 ‘이해’다. 팽팽히 맞서는 각각의 가치에 필요한 것은 성찰이자 이해였다. 하지만 이 모든 변화가 밀드레드의 분노가 담긴 광고판임을 미루어 보았을 때, 분노의 역할을 마냥 ‘부정’하기만은 또 힘들다.

  밀드레드에게 계속 비아냥대던 딕슨은 이제 사건 수사에 적극적으로 나서며, 밀드레드와 협동한다. 영원히 대립할 것 같던 양쪽의 가치는 이제 서로 ‘연대’하기 시작한다. 이때, 딕슨은 더 이상 어린 인물이 아니다. 사건 수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도 알고, 어머니에게 이불을 덮어주는 성숙한 모습을 보인다. 마지막 장면에서 밀드레드가 딕슨에게 자신이 방화를 했음을 알려도, 딕슨은 나름의 ‘용서’를 한다. 그가 받았던 오렌지 주스 한 컵의 용서를 이제는 남에게도 베풀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되기까지의 고난을 증명하는 듯 하는 얼굴의 흉터는 사회적 편견의 변화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보여준다.

  딕슨이 수사한 남자가 밀드레드 딸의 살인사건의 주범은 아니지만, 분명한 범죄자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를 처단하려 밀드레드와 딕슨이 함께 가는 마지막 장면은 많은 해석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엔딩은 영화 전체의 초점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초반부터 사건 수사가 아닌 밀드레드에게 일어나는 일에 초점을 맞춘 것처럼, 엔딩도 범인을 잡았는가 혹은 범죄자를 처단했는가에 주목하고 있지 않다. 엔딩 시퀀스는 두 인물의 분노가 향하는 방향의 선회에 주목하고 있다. 이제 두 인물은 서로에게 비생산적으로 분노를 쏟아내지 않고, 사건 해결을 위해 연대하며 분노한다. 그들은 이제 분노가 향해야 할 방향이 진정 어딘지 알게 된 것이다.

  숨겨져 있던 사회의 추한 모습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이제 이에 변화를 요구하는 세상이다. 우리는 과연 어떤 방식으로 세상에 맞설 것인가? 마틴 맥도나는 <쓰리 빌보드>를 통해 ‘분노’에 대해 방법론적 고찰을 보여줬다. 이동진 평론가의 “좋은 영화는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쓰리 빌보드>는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과연 분노가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에 대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모호한 대답을 한다. 관객들이 스스로 생각하도록 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사회의 악습과 편견에 경종을 울리고 변화의 싹을 마련한 것은 밀드레드의 붉은 광고판이었다. 윌러비 서장도 광고판을 혁신적이었다고 하는 것처럼, 분명히 분노는 의미가 있었다. 결과론적으로는 이 광고판으로 인해 멈춰져 있던 변화의 톱니바퀴에 시동이 걸린 것이다. 반면, 이 광고판이라는 형상화된 분노가 가져오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밀드레드 개인에게 닥치는 어려움뿐만 아니라, 의도치 않게 누군가를 다치게 하기도 한다. 시대 문제의 타개와 분노의 관계는 상당히 복합적이다. 완전히 동일하지도 다르지도 않다. 등호라는 수학적 기호를 통해 표현할 수 없는 이 관계처럼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마틴 맥도나 감독의 각본이 훌륭한 것도 이 점에서 알 수 있다. 전작인 <킬러들의 도시>나 <세븐 싸이코 패스>처럼 그의 각본은 평범한 전개를 거부한다. 그는 세상이 작동하는 다양한 원리에 대해 고찰한 후, 이를 그의 방식으로 아주 자연스럽게 전개한다. <쓰리 빌보드>는 특히 그의 고찰이 잘 담겨 있는 작품이다. 편견과 분노에 관해서 그는 일반적인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다양한 시각을 제시한다. 이는 그가 단순치 않은 사회에 대해서 얼마나 고민한지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내용을 잘 전달하기 위한 고민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시종일관 밀드레드의 상황에서 우러나오는 웃지 못할 개그를 통해 유머러스함을 추구하고, 과장을 위해 덧붙이지 않는 블랙코미디다. <쓰리 빌보드>라는 작품이 골든 글로브 시상식을 휩쓸고, 아카데미에서 계속 노미네이트 된 것은 분명 우연은 아닐 것이다. 고뇌를 개성이 강한 인물들과 색을 통해 ‘시각화’하는 어려운 작업을 해낸 것이다.

  분명 <쓰리 빌보드>는 무조건적으로 분노를 권하지 않는다. 이를 통해 생각하고 분노하는 것은 보는 관객들의 선택으로 넘겨진다. 우리는 사회에 분노해야 하는가? 분노는 순기능과 역기능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 영화를 통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분노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분노를 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하지 못해서는 안 된다. 분명히 분노만이 변화를 이끌어 내는 지점은 존재한다. 분노를 표출하고, 점점 맞물려 키워지는 분노를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또, 레드 웰비가 딕슨에게 건넨 오렌지 주스처럼 때로는 더 큰 변화를 위해 분노보다 ‘용서’ 혹은 ‘이해’가 필요한 지점도 있다. 세상은 우리의 생각보다도 복잡하고 오묘하다. 세상과의 투쟁에서 우리는 다양한 방법을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쓰리 빌보드>가 고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당신은 세상에 어떤 제스처를 취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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