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나쁜 글을 쓰면 어떡해. 예쁜 글만 써야지.” 교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책상 위에 놓인 지역신문을 손가락으로 탁탁 두드렸다. ‘식당은 좁고 시간에 쫓겨…급식 너무 불편.’ 책상 앞에 공손히 서서 내가 쓴 ‘나쁜 글’의 제목을 눈으로 좇았다. 무서웠다. 교장의 손가락이, 교장실을 나가면 머리 위로 떨어질 선생님들의 눈총이 무서웠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할 수 없어 ‘죄송합니다’만 반복했다. 얼마 뒤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내쫓기듯 전학을 나왔다.

  6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책상 앞에 서서 떨던 고등학생은 이제 대학생이 돼 지역신문 대신 중대신문에 ‘나쁜 글’을 쓴다. 올해 초에도 경영학부 A교수의 성폭력 의혹을 제기하는 ‘나쁜 글’을 썼다.

  시작은 중앙대 대나무숲 페이스북 페이지에 올라온 글 하나였다. A교수가 오랫동안 학생들에게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내용이었다. 글에 달린 댓글마다 메시지를 보냈다. 에브리타임에도 어떤 교수인지 물어 증언을 모았다. 생각보다 내용은 심각했다. 성희롱에서 팔짱까지, 물어볼수록 A교수를 향한 증언은 더 나오기만 했다.

  취재를 진행하며 화가 났다. A교수는 학생들의 증언에도 ‘그런 적 없다’며 변명하기만 했다. 더 확실하고 나쁜 증거를 찾아야 했다. 증언이 더 구체적일수록 유리했다. 학생들에게서 계속 증언을 구했고 증거를 모았다. 조금 흥분했는지도 몰랐다. 단독보도였고 중요한 문제였으니까.
일은 그때 터졌다. 한 학생이 더 이상 취재에 응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학생은 내가 기사 내용에만 너무 집착한다고, 내가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했다. “기자님, 저 무서워요. 교수님이 제가 누군지 알아채고 보복할까봐 무섭고 졸업을 못할까봐 무서워요.”

  순간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6년 전 책상 앞에 서있는 학생의 모습이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부끄러움이 온몸에 몰려들었다.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할 리 없었다. 잊고 있었다. 왜 6년 전 내가 ‘죄송합니다’밖에 말하지 못했는지, 왜 울면서 학교를 나와야만 했는지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학생에게 전화해 사과하고 그의 이야기를  다시 들었다. 그제야 이제까지 내가 귀를 반쯤 덮은 채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야기의 내용만 들었지, 그 속에 든 감정을 이해하고 배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피해자의 이야기를 온전히 듣지 못한 기자는 결코 좋은 글을 쓸 수 없다. 기사가 가져야 할 문제의식을 제대로 가지지도, 피해자를 배려해주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귀를 가린 채 쓴 글은 진정으로 나쁜 글이 된다.

  기사가 나간 뒤 시간이 흘렀다. 나는 오늘도 내가 매주 쓰는 ‘나쁜 글’이 진정 나쁜 글은 아닐까 돌아본다. 귀를 덮은 채 쓰지는 않았을까, 스스로가 오히려 피해자들을 두드리는 손가락이 된 것은 아닐까 늘 무섭다. 그러나 나는 더 무서워해야 한다. 무서워하지 않고 좋은 글을 쓸 수는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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