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의 중요한 회의를 중대신문에 직접 공개하는 일이 늘고 있다. 밀실 행정보다 좋은 일이지만, 그만큼 언론의 책임은 더 커졌다. 사실보도와 논점 설정에 있어 충분한 전문성과 독립성을 인정받지 못하면 존립의 정당성을 위협받을 수도 있다. 지난 제1918호 ‘Editor’s Letter’는 이런 어려워진 상황을 보여준다.

  최근 교수협의회(교협)는 중대신문의 대학평의회 선출 사설에 성명을 냈다. 교협이 더 좋은 보도를 위한 설명에 소홀했다면 잘못이며, 만에 하나 ‘가르침의 대상’으로 대했다면 정말 한심한 일이다. 중대신문이 대학의 기구와 운영에 대한 전문적 내용을 살피지 못했다면 이 또한 잘못된 일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중대신문을 흔드는’ 한심한 짓은 객관성과 독립성, 이를 뒷받침하는 전문성으로 풀어갈 수밖에 없다. 학내의 민감한 이슈들에 대한 성역 없는 질문이 가능할수록 중대신문은 존재 이유를 지킬 수 있다.

  대학평의회 문제는 우리 대학의 다양한 속사정을 알아야 사실판단이 가능하다. 수십 명 앉아서 눈치 보는 회의장에 갇히지 말고 직접 사실과 논점을 찾아가야 한다. 무책임한 주장, 감정 섞인 비난에서도 실마리를 찾아내고 전문가들의 판단도 구해야 한다. 정리된 시각과 검증된 내용을 위한 조언이 아닌 누군가의 ‘감독 혹은 지도’가 있다면 이 또한 ‘흔드는 손’일 뿐이다.

  학교 안에서 ‘늘 하던 일’이 넓은 세상에서는 뭇매를 맞는 경우가 있다. 학내언론에 대한 생각과 관행에는 세상의 이치와 어긋난 일이 없을까? 월급 받는 교수의 무능과 잘못도 그냥 두는데 학생이 중심이 된 학내언론에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고? 타협하는 순간 성장은 멈춘다. 대학은 성장을 돕기 위해 존재하고 언론은 원래 힘들고 위험한 일이다.

  첨예하고 복잡한 현안은 중대신문이 스스로 지키며 성장하게 돕는 선물이다.

박찬희 교수

경영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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