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이란 분명히 희망의 이름이며 깨어있는 정신의 이름이다. 역사는 언제
나 청년의 대열에 마땅히 있어야 하며 청년의 대열은 그 역사의 `부름'에 나
름대로 응답해 왔다"청년 그룹을 `희망의 집단명사'로 표현하기도 했던 언론
인 김중배 선생은 일찍이 청년정신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이러한 희망의
집단명사를 길러내는 곳, 중앙대학교를 창설한 곳에 임영신 박사가 있었다면
이들에게 청년의 의식, 중앙의 의식을 심어준 곳에는 교가제작자 김태오 당
시 문리대 교수가 있었다."남산이 영을넘어 바라보이고…/의에 죽고 참에 삶
이 모교의 정신/세계에 빛내세 우리 중앙대학교" 중앙에 첫발을 들여 놓는
입학식에서 배우게 되는 교가. 우리 나라의 국가(國歌)가 애국가(愛國歌)인
것만을 보더라도 중앙에 대한 애교심은 이 교가에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교
가 제작자 김태오 교수는 1903년 7월 16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혈기가 왕
성했던 청년시기, 당시 우리나라는 일제의 침략으로 주권이 박탈된 상태였다
. 의병들의 무력투쟁이 주가 되어 곳곳에서 활발한 항일활동이 벌어지고 있
을 즈음, 김태오 교수는 항일활동의 새로운 방향모색으로 교육을 통한 독립
의 방법을 생각하게 된다.이에 일본 동경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하여 수학한
뒤 동대학원에서 민족심리, 교육심리, 교육행정을 연구한다. 유학도중,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지 않고 김정운, 이윤호, 최윤향 등과 함께 한국독립단을 조
직하여 군자금을 조달하기도 했다. 해방이후 모교의 전신인 중앙보육학교가
복교하게 되면서 드디어 임영신 박사와 학교기틀 마련의 초석으로 자리매김
한다.`이제 중앙의 정신은 독립을 위한 실력양성이 아니라, 신생조국을 건설
할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다.'1945년 9월 28일, 복교와 함께 김태오 교수는
임영신 박사와 함께 `신생조국 인재양성소'의 구비를 갖추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인다. 먼저 평소 임영신 박사의 이념인 `의에 죽고 참에 살자'를
교훈으로 제정하고 김태오 교수는 이 이념에 걸맞는 교가를 제작한다.1950년
5월, 드디어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게 되나 6.25동란으로 무기휴교령이 내려
지게 됨으로써 수업중단 위기를 맞는다."전시중일지라도 중앙의 교육은 한시
도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 임영신 박사와 뜻을 같이한 김태오 교수는 부산
에 임시대학을 설치하기 위해 피난길에 오른다. 피난도중 김태오 교수는 자
신의 몸지키기는 뒷전으로 한채 열차에 학교서류를 실어 부산으로 옮기기에
힘을 다하고 전시중 학자금 조달에 힘쓰는 등 민족교육자로서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단지 교장 임영신 박사, 부교장 김태오 교수가 아닌 `의와 참'의 정
신을 의혈교정에 심었던 두 교육자.그들은 영원한 중앙의 동반자요, 한 몸이
었다.

<김선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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