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다. 「82년생 김지영」에서 김지영씨는 여성이란 이유로 회사의 장기 프로젝트에 참가하지 못한다. 여성은 임신하면 곧 퇴사할 것이라는 회사의 판단 때문이다. 그런데 친구는 책에서 회사가 나쁘게 그려진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회사 입장에서는 그게 합리적인 거 아냐? 기껏 프로젝트를 맡겼는데 퇴사를 하면 회사는 ‘합리적’불이익을 얻는 거잖아.” 

  ‘합리성’은 ‘이론이나 이치에 합당한 성질’을 뜻한다. 인간에게 합리성이란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경제, 사회, 철학 모든 분야마다 합리성은 결코 빠지지 않는다. 경제학의 가장 기본적인 가정도 ‘모든 사람은 합리적이다’이다. 반달무늬 돌칼에서 인공지능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거침없는 발전에는 이익을 재고하고 비교하는 행위가 늘 함께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의 합리성에는 한 가지 중요한 사항이 빠져있다. 바로 ‘감수성’이다. 감수성은 주변의 상황과 감정을 이해하는 능력이다. 감수성이 없으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 사회적 약자가 왜 투쟁하는지, 왜 사회가 그들의 손을 들어줘야 하는지 알 수도 없고 알려 하지도 않게 된다.

  감수성 없이 합리성만을 기반으로 이뤄진 사회는 그 자체로 물질적인 진보와 발전만을 추구한다. 발전에 뒤처지거나 조금이라도 발전을 저해한다고 판단된 존재는 가차 없이 제거되고 무시된다. 장애인, 여성, 외국인 등 약자나 소수자는 이 ‘합리적’ 공화국에서 고려되지 못한다. 사회가 그들을 발전에 저해되는 요소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김지영씨의 회사는 이 ‘합리적’ 사회에 세워졌다. 회사의 합리적 판단은 이렇다. 김지영씨는 임신을 하면 휴가를 줘야 하기 때문에 회사에 해가 된다. 그래서 회사는 김지영씨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고 김지영씨가 임신을 하면 쫓아낼 예정이다. 이 모든 과정은 ‘합리성’에 따라 당연한 절차로 여겨진다. 왜 정부는 회사에 출산 휴가 보조를 하지 않았는지, 기회를 박탈당한 여성은 어떤 심정일지 따위는 고려되지 않는다. 그런 감수성은 ‘합리적’ 판단에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친구는 책이 회사를 나쁘게 그렸다고 비판했지만 사실 그 부분은 회사 하나의 잘못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 회사가 세워진 ‘합리적’ 사회가 나쁘다는 이야기다. 사회가 약자를 이해하지 않았고, 약자를 ‘필요 없는 존재’로 치부했고, 약자가 능력을 펼칠 배경조차 만들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롤스는 정의란 무지의 베일을 쓴 채 합의된 법칙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모든 사람이 약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서로의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이 말은 결국 감수성을 키워야 한다는 말과 같다. 모두가 동등한 상황에서 겨루고 성장할 수 있을 때 구성원 전체가 행복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 사회의 합리성에 부족한 감수성이 필요한 이유다. 합리(理)성이 합리(利)성이 돼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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