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혹은 상투어 너머의 윤리 
  • 중대신문
  • 승인 2018.03.19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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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로스, 『휴먼 스테인』 (문학동네 펴냄) 

#미투 운동이 시대정신이 된 현 상황에서 필립 로스를 떠올린다는 건 위험한 일이다. 필립 로스의 소설 『휴먼 스테인』에서 주인공인 원로 고전학 교수 콜먼 실크는 인종주의자와 성차별주의자라는 비난을 받는다. 그가 결석한 학생에게 흑인 비하의 뜻이 담긴 ‘유령(spooks)’라는 용어를 썼다는 게 전자의 이유고, 그가 글을 못 읽는 30세 연하의 대학청소노동자 포니아와 연인관계라는 점이 백인·남성·교수라는 직위를 이용한 성적 착취라는 게 후자의 이유다. 

  그럴듯하지만, 소설을 읽어나가다 보면 우리는 이 두 비판이 진실과 상반됨을 알게 된다. 콜먼은 하얀 피부를 가진 흑인이었고, 콜먼과 포니아는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주며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들이 사고로 죽은 후에도 진실은 밝혀지지 않는다. 오직 콜먼의 친구인 화자 주커먼만이 진실을 알고 있으며, 그는 소설을 씀으로써 침묵을 거부한다.

  필립 로스의 소설에는 문학이 말하는 윤리의 핵심이 있으니, 곧 ‘아무도 (타인을) 모른다’는 것이다. 사법과 도덕의 윤리는 명쾌하다. 범죄구성요건에 해당하면 범죄이고 아니면 무죄다. 사회가 도덕적이라고 여기는 규범과 일치하면 도덕이고 아니면 부도덕이다. 

  하지만 문학의 윤리는 모호하다. 우리가 확실히 안다고 믿는 것들 자체가 하나의 상투성일 수 있으며, 인간의 모든 경험은 그것을 요약한 언어와는 달리 진부하지 않다. 판사의 판결문이나 신문기사나 인터넷 댓글이 진실과 거짓을 언제나 분명하게 나누지만, 문학(크게는 예술)은 진실과 거짓의 경계 안에 있는 온갖 다양하고 복잡한 사실, 의견, 관점에 더 신경을 쓰면서 우리가 언제나 제대로 알 수 없음을 강조한다.

  『위대한 개츠비』의 개츠비는 신문기사에서 사람을 치어죽인 뺑소니범이지만 독자인 우리는 진짜 운전자가 데이지임을 안다. 『금각사』의 미조구치는 보물인 금각사를 불태운 정신병자 방화범이지만 독자인 우리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미에 대해 어떤 고민을 했는지를 안다. ‘모른다는 윤리’는 단순한 냉소나 회의가 아니며, 너무나 쉽게 주장되고 믿어지는 진실이 가진 다양하고 모순적인 측면들에 대한 힘겨운 강조다.

  #미투 운동은 분명 터질 수밖에 없는 여성의 분노가 집약된 정의롭고 정당한 운동이자 시대정신이다. 이 기회를 맞아 사법과 도덕과 정치는 철저히 폭력을 응징해야 한다. 하지만 문학은 운동에 동참하면서도 동시에 정의와 정당함과 진실이 언제나 완전무결하지 않음을 끊임없이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이 고민은 떳떳이 말해져야 하고 상세히 논의돼야 한다. 닥칠 비난이 두려워 그런 고민을 말할 수 없게 될 때, 그때 모든 위대한 운동과 이념과 가치는 ‘상투어’로 전락할 위험에 빠진다. 

  필립 로스의 『휴먼 스테인』은 우리에게 상투어로 전락하는 위대함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오늘날 #미투 운동을 둘러싼 한국의 담론은 이를 실천하기가 얼마나 힘들고 지난한지 우리에게 매일 보여주는 중이다.

 

문형준 교수 영어영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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