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를 벗어나, 움직이는 세상을 표현하다
  • 공하은 기자
  • 승인 2018.03.19 09: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 출신 윌리엄 켄트리지(1955~)는 남아공 사회와 풍경을 자신의 그림에 담은 참여미술의 대가로 불립니다. 남아공 정치경제를 장악하던 백인임에도 그의 그림에는 인종차별, 인종분쟁에 대한 비판의식이 담겨 있죠. 목탄으로 휘날리는 드로잉 속엔 그가 기대한 세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목탄의 고르지 못한 질감과 흑백으로 대비되는 색감 표현은 단순하면서도 정제되지 않은 강렬함을 드러낸다. 윌리엄 켄트리지는 이러한 목탄 드로잉 기법을 사용하여 아프리카의 암울한 역사를 담아냈다. 또한 그는 2차원적 드로잉뿐 아니라 다양한 방식을 동원해 자신만의 장르를 개척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만난 이수정 학예사와 함께 켄트리지의 미술 세계를 살펴보자.

「Self-portrait(Testing the Library)」, charcoal on paper, 66X51cm, 1998
「Self-portrait(Testing the Library)」, charcoal on paper, 66X51cm, 1998

  아픈 역사를 새기다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의 근대사는 치열했다. 1448년 포르투갈 탐험가가 남아공에 첫발을 내딛었다. 이후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등 유럽국가로부터 백인 이민자가 지속적으로 유입됐다. 유럽 이주민은 원주민의 토지를 약탈하고 그들을 노예로 삼으려 했다. 이에 반발한 원주민은 이주민에 대항해 약 100년간의 전쟁을 치렀지만 결국 1815년, 남아공은 영국의 식민지가 된다.

  식민 통치 아래 수립된 남아공 정부는 ‘아파르트헤이트’라는 극단적 인종차별정책을 내세워 유색인종을 지속적으로 억압해왔다. 소수의 백인이 대부분의 부와 권력을 쥐고 유색인종을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배척한 것이다.

  혼돈의 역사 속에서 남아공의 예술문화는 뚜렷한 특징을 보일 만큼 발전하지 못했다. 그러한 가운데 한 남아공 출신 화가가 유럽에서 명성을 얻게 됐다. 백인이지만 아프리카 인종차별의 실상을 그려 세계에 알린 화가, 그가 바로 윌리엄 켄트리지다.

  나무 끝에서 태어난 아프리카
  켄트리지는 남아공으로 이주한 리투아니아-독일계 유대인 3세다. 그럼에도 켄트리지의 그림에는 백인이 자행했던 인종차별과 그로 인한 분쟁이 주 소재로 등장한다. 이수정 학예사는 이러한 주제가 자주 등장하는 데에는 인권변호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켄트리지의 아버지는 여러 인종 분쟁 사건에서 흑인 인권운동가를 변호해온 것으로 유명합니다. 켄트리지가 어린 시절 아버지의 사건자료에서 본 학살 장면들이 그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그것이 그의 작품 활동에 자연스럽게 반영됐죠.” 역설적인 제목으로 눈길을 끄는 「Casspirs Full of Love」에서 참혹하게 그려진 잘린 머리들은 그의 머릿속에 각인돼 있는 학살의 참상을 그대로 느끼게 한다. 또한 「Other Faces」에서 재현한 황량한 풍경 등은 여전히 남아있는 분쟁의 상흔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Casspirs Full of Love」, drypoint etching, 167X94cm, 1989
「Casspirs Full of Love」, drypoint etching, 167X94cm, 1989
「Drawing for Other Faces (Monument)」, charcoal and coloured pencil on paper, 57X78.5cm, 2011
「Drawing for Other Faces (Monument)」, charcoal and coloured pencil on paper, 57X78.5cm, 2011

  켄트리지는 「소호와 펠릭스」와 같이 인종차별을 주제로 한 목탄 드로잉 애니메이션 작품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수정 학예사는 켄트리지가 목탄을 이용한 독창적인 드로잉 방식을 통해 자신만의 예술영역을 구축했다고 전했다. “켄트리지는 그림을 그리고 지우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드로잉의 흔적을 그대로 남기는 ‘팰림세스트(palimpsest)’ 방식을 사용했어요.” 이러한 방식을 통해 목탄의 거친 느낌과 시간의 흐름 및 움직임이 드로잉 한 장에 모두 담기는 효과를 누린 것이다.

  그의 드로잉 애니메이션에는 또 하나의 독특한 특징이 있다. 켄트리지는 작품의 줄거리를 미리 정해놓고 작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림을 그려나가는 켄트리지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그러나 작품을 관통하는 명확한 주제의식은 관객에게 확실히 전달된다.

  움직임은 움직임을 낳는다
  ‘움직임’에 대한 그의 연구는 이후에도 계속됐다. 인종차별에 대한 켄트리지의 주제의식은 캔버스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표현됐다. 특히 공연예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의 연출적 소양은 연극과 영화에 대한 깊은 관심에서 기인한다. 켄트리지는 어릴 적 배우의 꿈을 가지고 연극학교를 다닌 적이 있으며 이후에는 극단 대표가 되어 인형극단을 이끌기도 했다. 또한 방송용 영상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등 영상에도 관심이 많았다. 연극, 영상 등 다양한 미디어를 활용하는 켄트리지의 작품 활동에는 이러한 경력들이 밑거름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켄트리지는 오늘날의 나미비아에서 있었던 헤레로 대학살 사건을 디지털 매체를 통해 연극으로 표현했다. 헤레로 대학살 사건은 독일의 식민지였던 나미비아에서 독일의 수탈과 학대에 분노한 아프리카 헤레로족이 봉기한 사건이다. 독일군은 헤레로족을 무차별 진압하였고, 그 과정에서 헤레로족 인구의 약 80%가 살해되었다. 이수정 학예사는 드로잉을 기반으로 한 애니메이션에 조각, 음악, 기계장치를 결합시켜 표현한 「Black Box Chambre Noire」를 켄트리지의 대표적인 공연예술작품으로 소개했다. “이 작품은 켄트리지가 몇 명의 무대예술인과 협업해 제작한 이동식 소극장이에요. 디지털 시스템에 의해 움직이는 종이인형극이죠. 대학살이라는 가슴 아픈 주제를 다루면서도 아름다운 음악과 사진, 드로잉이 시선을 사로잡는 명작이에요.” 켄트리지는 이 작품을 독일에서 최초로 선보임으로써 남아공뿐만 아니라 그 시절 유색인종에 가해졌던 차별과 폭력의 전반을 표현했다. 이수정 학예사는 켄트리지 작품에 드러나는 주제가 ‘혁명’에 대한 그의 관심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광기에 가까운 에너지가 그를 매료시켰던 거죠.”

  켄트리지는 벽화를 활용한 미디어 프로젝션 작품에도 도전했다. 이수정 학예사는 켄트리지가 로마 티베르 강변에서 선보인 「Triumphs and Laments」를 소개했다. “역사 속 로마의 승리와 비극의 순간을 담은 작품이에요. 승전국이었던 로마 땅에서 전쟁의 잔상으로 남은 슬픔과 절망감을 표현했다는 데 의의가 있죠. 강변의 벽면에 그림을 그려 넣고 그 위에 영상을 상영했어요. 켄트리지는 자신만의 새로운 벽화 양식을 개발한 거예요.”

「Triumphs and Laments」, fresco, 2014
「Triumphs and Laments」, fresco, 2014

  혁명의 열정을 동경하는 켄트리지는 최근에 오페라 장르에 도전하는 등 여전히 혁신적인 행보를 걷고 있다. 이수정 학예사는 켄트리지를 ‘가슴 뛰는 음악을 좋아하고 실험적인 연극을 사랑하는 작가’라고 묘사했다. 덧붙여 그는 다른 이들의 고통에 관심을 갖는 것이 지식인으로서의 숭고한 과업이라며 켄트리지의 업적을 기렸다. “훌륭한 예술이란 우리를 진보된 생각으로 이끌어 주죠. 켄트리지는 우리로 하여금 그의 작품을 통해 인간과 인권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훌륭한 예술가예요.”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