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덥석 깨물고, 우리의 언어를 새롭게 만들어 소리칠 것입니다.’ 프랑스 여성학자 엘렌 식수의 말이다. 누군가에게만 당연한 언어의 서사 속 배제당한 이들이 있다.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갖지 못한 이들은 자신을 찾기 위해 오늘도 배움을 거듭한다. 여성주의 학회 ‘여백’의 하현수 회장(가명·미디어커뮤니케이션 2)을 만났다.
 
 -여백이라니, 간결하고 예쁜 이름이네요.
 “감사해요(웃음). 학회 전반의 방향성을 담은 이름이에요. 사람들은 빈틈없이 이 공간에 함께 존재하는데 무언가 이곳을 빈 공간처럼 보이게 하는 것 같았어요. 모두의 공간에 한 정체성의 목소리만 들린다는 건 다른 정체성의 존재를 지워낸 결과니까요. 지워진 공간을 채우고 있는 여백에 주목해 다양한 소리를 키우고자 하는 곳이 여백이에요.”
 
 -어떻게 그 ‘여백’을 볼 수 있을까요?
 “제가 배웠던 사회 이론은 대개 특정 범주 내에서 일반화한 체계로 구성됐던 것 같아요. 반면 여성주의 이론은 그 이론의 전제인 특정 범주를 해체하는 작업에서 시작되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 범주에 속하지 못한 이들을 포착하는 거죠. 그들에게는 일반화될 수 없는 이론일지도 모르니까요. 포착되지 못한 경험과 이를 포착하기 위한 논의를 세미나와 강연 등에서 배우고 있어요.”
 
 -세미나도 특별한 지점이 있을 것 같아요.
 “네. 여백은 학회인 동시에 서로의 ‘나’를 지켜주는 연대 공동체이기도 해요. 그래서 각자의 경험을 나누는 시간을 많이 가지는 것 같아요. 발제에 앞서 한 주의 이슈를 정리하며 말문을 열기 어려웠던 생각과 경험을 있는 그대로 꺼내놓곤 하죠. 말하는 이는 얘기하는 행위 자체로 상처에 위로를 얻기도 하고, 듣는 이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성찰하는 경험을 할 수 있어요. 이슈는 항상 다양해요. 가령 지난주의 이슈 중 하나는 ‘낙태죄 폐지’ 청원에 대한 청와대의 입장이었죠.”
 
 -그럼 발제에선 어떤 주제를 다루시나요?
 “발제의 주제는 첫 세미나에서 함께 정한 커리큘럼을 따라요. 제가 발제했던 주제는 ‘강남역 페미사이드 이후의 페미니즘’이었어요. 2015년 전후의 ‘페미니즘 리부트’부터 강남역 여성 혐오 살인사건을 겪으며 페미니즘의 물결이 어떻게 일어나게 됐는지 정리했어요. 여성들의 경험담이 쏟아지면서 그동안 겪었던 불편이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적 문제였음을 깨닫게 되는 과정이라는 분석을 인용했는데 많은 학회원이 함께 공감해주었죠.”
 
 -방학 중에도 활발하게 활동한다고 들었어요.
 “방학 중에는 좀 더 세분된 주제를 심층적으로 공부해요. 지난 여름방학에는 영화, 퀴어, 푸코, 혐오라는 네 가지 테마로 세미나를 진행했어요. 이 중 저는 혐오 세미나를 수강했죠. 일상적인 표현에서조차도 많은 혐오의 의미가 담겨있다는 사실에 놀란 적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마사 너스바움의 저서 『혐오와 수치심』과 『혐오에서 인류애로』를 매주 함께 읽고 발제와 토의를 했어요. 인간에게서 혐오라는 감정이 구성되는 과정을 공부하고 고민했죠.”
 
 -정말 모두의 ‘나’를 지키는 방법을 배우셨네요.
 “같은 마음을 가진 이들과 함께 서로를 그대로 보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 자체가 의미 있으니까요. 누군가에겐 이 공동체가 자신을 숨기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연대의 확장을 지속하고 있어요. 페미니스트·퀴어 공동체 ‘FUQ’에 소속돼 다양한 부스 운영을 하기도 하고 인권주간에 행사를 기획하기도 하죠.”
 
 -외부로의 노출이 부담스럽지는 않으신가요?
 “교내뿐 아니라 타대에서도 여성주의 학회나 단체를 향한 공격이 종종 일어나곤 하잖아요. 그런 모습을 보면 두려움이 앞서 위축되기도 하죠. 그러나 여백이 다루는 고민이 더 밖으로 알려져야 해방적인 실천도 가능하다고 믿어요. 여성주의 연대체도 노력하고 있지만 학생 사회 내부의 근본적 변화가 필요한 시점인 것 같아요. 자치 문화에 영향력을 가진 학생 대표자들이 여백의 고민에 함께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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