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즐겨보는 TV쇼가 있다. 여장남자인 드랙퀸이 경연을 펼치는 <루폴의 드래그 레이스(RuPaul’s Drag Race)>라는 쇼프로그램이다. 쇼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단연 사회자와 참가자가 함께 복창하는 클로징 멘트다. “If you can’t love your-self, how you gonna love somebody else?(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누구를 사랑할 수 있을까?)” 참가자 모두가 성소수자임을 생각하면 그들이 외치는 말은 자신에게 되뇌는 주문과도 같다. 쇼가 끝날 때마다 주문에 걸린 듯 나 또한 자신을 사랑하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하지만 ‘나’는 정말 마음 놓고 나를 사랑할 수 있는 걸까.  

  얼마 전 술자리에서 친구가 “너는 왜 화장을 하니?”라고 물었다. “자기만족 때문이지”라고 답했던 기억이 난다. 술김에 가볍게 주고받은 말이었지만 다음날부터 친구가 던진 그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자기만족으로 꾸미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화장하기 바쁘거나 귀찮은 날도 굳이 화장을 하고 집을 나섰다. 화장하지 않은 날은 왠지 주눅 들고 위축됐다. 나는 화장하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사랑하고 있지 않았다. 

  민얼굴이 부끄러웠던 이유는 뭘까. 외부의 반응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었을 거다. 강박이라 해도 좋을 만큼 사회는 은연중에 꾸밈을 강요한다. 당장 예능 프로그램만 봐도 훌륭한 외모를 가졌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추앙하고 그렇지 않은 자는 웃음거리로 소비한다. 매체에 만연한 루키즘(Lookism)은 거름망 없이 그대로 사회 인식 밑바닥에 스며든 지 오래다.  

  꾸밈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진 않는다.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 오히려 ‘나’를 찾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인의 선택에 타인이 개입된 순간 폭력이 된다. 폭력엔 뒷걸음이 없다. ‘살을 빼면 아름다워진다’라는 말은 다이어트 후엔 ‘굶으면서 뺀 몸매는 아름답지 않으니 식이요법과 운동으로 살을 빼야 한다’로 바뀐다. 

  나를 사랑하기 힘든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다. 정체성과 직결된 성적지향을 찾아가는 길도 험난하다. 지난달 25일 ‘제1회 퀴어여성생활체육대회’가 동대문구체육관으로부터 대관 취소통보를 받았다. 공식적인 사유는 체육관 공사였다. 그러나 처음 밝힌 취소 사유가 미풍양속 때문이었다는 점에서 진위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

  사실관계를 떠나 21세기에 개인의 성정체성을 반대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존재하고, 더 나아가 공공기관에 당당하게 민원을 제기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놀라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체육대회 주최 측을 응원하기 위해 후원 댓글 창을 켜자 성수자를 차별하는 댓글이 버젓이 달려 있었다. 나의 존재가 미풍양속을 해친다고 말하는 사회에서 나는 ‘나’로 존재할 수 있을까.

  존재 자체를 반대하는 사람 앞에서 ‘나’는 초라하고 혼란스럽다. 혐오 세력이 몸집을 불려갈수록 진짜 ‘나’는 벽장 속에 모습을 감춘다. 세상 밖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하지만 껍데기 안 사람들은 서서히 곪아갈 뿐이다. 내가 ‘나’인지 고민하며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그러나 과정 앞에 장애물이 있어선 안 된다. 장애물 앞에서 ‘나’는 자신을 의심하고 검열할 수밖에 없다. 꾸미지 않은 내가 밖에 나가길 주저한 것처럼 말이다. 

  우리 앞을 가로막은 벽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같이 무너뜨려야 한다. 그 벽이 내 몫이 아니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벽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 벽은 일제히 말한다. 다름은 틀림이라고. 하지만 이젠 다름이 진짜 나이고,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고 그들에게 외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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