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름을 위한 
기꺼운 불편함

친한 친구들과 함께 밥을 먹다가 친구가 한 말에 머리를 얻어맞은 듯 했다. 한 개그프로그램을 추천하는 친구에게 그 프로그램이 소재로 사용하는 여성과 성 소수자에 대한 희화화가 불편하다고 말하던 차였다. 하지만 친구의 그 한마디에 모두가 동조하듯 와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그 속에서 나 혼자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나의 행동이 쓸데없는 트집 잡기에 불과했던 것이다. 웃음으로 둥굴렸지만 결국은 나의 문제제기가 ‘불편’하다는 그 의도만큼은 내 마음에 콱 박혔다.

  이는 비단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불편함은 이제 사회적으로 표출되기에 이르렀다. 지난해,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다. 선거 운동 당시 트럼프는 이민자, 여성, 동성애자 등을 조롱하고 부정하며 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하지만 이토록 거침없고 폭력적인 행보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는 클린턴을 제치고 미국의 대통령 자리를 차지했다. 

  트럼프 당선은 내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그는 경선 상대인 힐러리 클린턴을 ‘남편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여자’라고 비하하고, 멕시코 이민자들은 ‘미국으로 마약과 범죄를 가져오는 성범죄자’라고 표현했다. 그런 사람이 다수의 지지를 받아, 한 국가의 대표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도, 그 이유를 짐작할 수도 없었다.

  다수의 전문가들은 트럼프 당선의 결정적인 요인으로 ‘과도한’ 정치적 올바름을 꼽았다. 이전부터 미국 사회의 정치적 올바름에 억눌려 있던 사람들에게 트럼프는 말 그대로 ‘사이다’ 같이 통쾌한 존재였을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트럼프에 열광하고 결국 그를 자신의 대표로 선택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정치적 올바름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불평한다. 하지만 과연 표현의 자유가 누군가의 인권에 앞설 수 있는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물론 모든 인간에겐 자유롭게 표현하고 행동할 자유가 있다. 하지만 그 표현으로 인해 누군가의 자유와 인간다움 자체가 손상된다면, 과연 그를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 타인에 대한 고려 없이 자신의 자유만을 주장하는 것은 권리 행사가 아닌 일방적인 폭력에 불과하다. 

  또한 그들은 정치적 올바름이 특정 집단의 입장만을 대변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정치적 올바름의 근본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은 특정 집단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모든 구성원이 가지는 권리의 보편성을 확보하기 위한 일이다. 

  그를 위해 열악한 위치에 처한 약자의 위치를 끌어올리는 것은 당연하다. 때문에 약자의 입장을 우선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인권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소수자의 입지를 되찾기 위해 다른 이들의 영역을 빼앗는 게 아니다. 그저 다른 이들만큼의 공간을 부여하는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이 ‘불편하다’는 그 기분은 이해한다. 일상적으로 사용했던 언행을 검열하고 제거하는 작업은 엄격하고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다. ‘너는 잘못하고 있어’라는 말을 눈앞에서 듣는데 어느 누가 당혹스럽지 않겠는가. 

  하지만 진정 ‘편안함’을 원한다면, 이런 불편함은 감수해야 한다. 사회와 다수, 기득권은 당장의, 스스로의 편안함을 위해 수많은 존재들을 지워버렸다. 이성애, 백인, 비장애, 정상가족이 디폴트인 사회에서 이성애 외의 성애, 유색인종, 장애, 비정상가족 은 존재할 수조차 없었다. 이러한 사회에서 정치적 올바름은 그들을 다시 사회에 구현하는 방법 중 하나다. 

  당연함을 부수고 새로운 가치를 정립하는 과정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불편함을, 의식적인 노력을 자처하지 않는다면 모두가 그렇게 원하는 ‘평등’과 ‘자유’는 존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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