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순간 인간의 몸은 움직인다. 뛰거나 걷고 있을 때는 물론, 가만히 누워 자고 있을 때도 인간의 몸은 움직인다. 몸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당연하기에 우리는 일상적 몸짓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하지만 몸짓은 그 어떤 글이나 그림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열린 <역사를 몸으로 쓰다>전은 그 몸짓들이 하는 이야기들을 전했다.
 
장 후안, 가계도, 2000, M+Sigg 소장품  ⓒ 장 후안
장 후안, 가계도, 2000, M+Sigg 소장품 ⓒ 장 후안
 
  얼굴이 하는 이야기
  남자의 얼굴에 몇몇 글자가 쓰여 있다. 그가 누구인지 식별이 가능한 모습이다. 남자의 얼굴은 존재만으로도 그의 신원과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남자의 얼굴은 수많은 글자로 덮여간다. 글자가 남자의 얼굴을 점령해 갈수록 남자의 신원도 함께 지워진다. 마침내 얼굴이 글자로 가득 차자 처음 봤던 남자와 같은 사람인지 확신할 수도 없는 ‘새까만 얼굴의 사람’만이 존재한다. 글자들이 그의 정체성을 재구성한 것이다.

  남자는 중국의 현대 미술가 장 후안으로 얼굴에 적힌 수많은 글자는 그의 가족 및 지인의 이름, 그리고 중국의 속담이나 소설 등이었다. 글자들 각각은 인간이 관계를 맺는 수많은 타자와, 인간이 살면서 마주하는 역사와 문화들을 의미한다. 얼굴과 같은 타고난 신체적 표상이 수많은 글자로 지워지고 아예 새롭게 재구성되는 모습은 우리의 정체성이 과연 타고난 본연의 것으로만 구성되는지 의문을 갖게 한다. 한 개인의 정체성은 관계나 역사, 문화와 같은 주변적인 것들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이다.

  얼굴에 글자를 쓰는 간단한 퍼포먼스로 깊은 메세지를 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매개체가 사람의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사회적으로 얼굴은 사람의 정체성을 함의한다. 얼굴을 사용했다는 것만으로도 장 후안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정체성과 연관돼 있음을 누구나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러한 장 후안의 퍼포먼스는 신체가 그 자체로서 어떠한 맥락과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환기한다.
 
이케미즈 케이치, 호모사피엔스: 신사이바시 거리, 1965, 작가 제공 ⓒ 이케미즈 케이치
이케미즈 케이치, 호모사피엔스: 신사이바시 거리, 1965, 작가 제공 ⓒ 이케미즈 케이치
 
  호모 사피엔스: 동물의 한 종류
  한 남자가 철창에 갇혀있다. 철창 앞에는 ‘호모사피엔스/남자’라는 사인보드가 붙어있다. 마치 동물원 철창에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동물이 갇혀있는 듯한 형국이다. 일반적으로 철창 밖에 존재하던 인간이 사인보드를 붙인 채 철창 안에 있는 모습은 이질적인 느낌을 준다.

  일본 작가 이케미즈 케이치는 인간인 자신의 육체를 보다 열등하다고 여겨지는 동물의 위치에 둠으로써 인간과 동물의 위계에 존재론적 의문을 던진다. 동물이 철창 안에 있는 것은 당연하고 사람이 철창 안에 있는 것은 이질적일 이유가 있냐는 것이다.

  그를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그 의미를 더욱 강화시킨다. 철창을 벗어난다면 이케미즈는 거리에 쉽게 녹아 들어갈 수 있는 보통의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 철창에 갇혀서 팻말을 걸고 있는 것만으로 ‘신기한 구경거리’가 됐다. 이는 동물은 열등해서 철창 안에서 구경거리가 되고, 인간은 보다 고등해서 철창 밖에서 구경하는 게 아님을 시사한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 자연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어졌던 위계는 단지 철창이 만든 허상일 뿐이었다.
 
산티아고 시에라, 10명의 노동자 등에 뿌려진 폴리우레탄, 2004, 작가 및 리슨 갤러리(런던) 제공   ⓒ 산티아고 시에라
산티아고 시에라, 10명의 노동자 등에 뿌려진 폴리우레탄, 2004, 작가 및 리슨 갤러리(런던) 제공 ⓒ 산티아고 시에라
 
  불쾌함의 끝에서 보이는 것은
  하얀 방호복을 입은 10명의 사람이 있다. 영국에 이주한 이라크 노동자들이다. 그들은 모두 까맣고 두꺼운 비닐을 두르고 있다. 방호복을 입은 다른 남성이 와서 그들이 두르고 있는 비닐에 하얀 가루를 사정없이 분사한다. 독한 화학 폴리우레탄이다. 자신들에게 뿌려지는 폴리우레탄에 10명의 사람은 동요한다. 표정을 확인할 순 없지만 고통스러워하며 그 순간을 견뎌내고 있다는 것은 느껴진다. 이내 폴리우레탄이 그들의 목까지 덮고 사람들은 하나의 하얀 덩어리가 된다.

  하얀 덩어리가 될 때까지 견뎌낸 노동자들의 노력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잔혹하게도 그들의 노력이나 그들이 감내해낸 고통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이 작품의 작가인 산티아고 시에라는 이민자, 퇴역병, 노숙자, 무직자 등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이들의 신체를 최소한의 보수로 고용한 후 가혹하고 무의미한 일을 시키는 퍼포먼스를 하는 스페인 작가다. 몸에 아무 의미 없는 일직선의 문신을 새긴다든가, 미술관에서 그저 벽을 보고 서 있게 한다든가, 머리통을 샛노랗게 물들이게 하는 등의 일들이다. 고용된 사람들은 보수를 받기 위해 ‘존엄한 인간’으로서 대우받지 못한 채 그저 하나의 육체로써 시에라가 시키는 굴욕적인 일들을 수행했다.
 
  이 작품도 이러한 퍼포먼스의 일환이었다. 10명의 이라크 이주 노동자들은 단지 ‘소외된 자들’ 중 하나일 뿐이었고, 그들의 몸에 뿌려진 폴리우레탄 역시 단지 ‘가혹하고 무의미한’ 일의 한 종류였을 뿐이었다. 돈으로 고용됐다는 이유로 비인간적인 행위를 당하는 이들을 마주하는 일은 불편하다 못해 불쾌한 감정까지 유발한다. 그들이 소수자임과 동시에 시에라가 지급하는  소정의 돈이라도 간절한 빈곤층이라는 사실은 그 불쾌감을 더더욱 증폭시킨다. 시에라의 작품은 도덕적으로 부당하다는 비난을 피해갈 수 없었다.

  하지만 쇄도하는 비난에 시에라는 현실에선 그 부당함이 너무 당연하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만능이다. 돈이면 인간의 존엄성, 육체, 시간마저도 살 수 있다. 자본주의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현대사회엔 인간의 존엄성 따윈 짓밟힌 채 저임금으로 착취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시에라는 그저 사회 저변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들을 예술이란 이름을 걸고 내보였을 뿐이었던 것이다. 김미경씨(50)는 시에라의 작품이 너무도 불쾌했기에 그 의미가 더 와 닿았다고 말했다. “작품을 위해서라지만 사람들을 값싸게 고용해 건강을 해칠 만큼 위험한 작업을 한다는 사실이 역겨웠어요. 너무 혐오스러워서 작가의 의도를 더욱 선명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죠.”

  시에라의 작품에서 느끼는 부당함이, 당연하다 인식하고 내면화해 왔던 자본주의의 논리라는 것을 깨달을 때 불쾌감은 더 강화된다. 미묘한 죄책감이 동반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동조하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결국 이 부당한 착취의 공범일 수밖에 없었다.
 
  에필로그
  흔히들 말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 몸으로 무언가를 행해야만 이야기를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몸은 그 자체로서도 수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장여원씨(28)는 전시를 통해 몸이 전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고 말했다. “제 몸과 몸 자체가 지니는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이었어요. 한 페이지 분량의 글자보다 3초가량의 몸짓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죠.”

  관념투성이인 인간이란 존재에 있어 몸은 유일하게 실재하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 그 자체이자, 타인을 마주하는 사회적 장소다. 그렇기에 몸으로 쓰는 역사는 그 어떤 매체보다 깊고 풍부한 이야기를 전할 수밖에 없다. 몸은 역사를 담고 있는 저장고이자 역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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