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부장은 안 하겠다고 말하던 정기자가 어느새 부장이 돼, 마지막 칼럼을 쓰고 있다. 마지막 칼럼이란 말이 주는 무게 때문에 무언가 더 특별하게 잘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글쎄. 부장이란 자리가 녹록지 않아서 칼럼으로 거창한 고민을 할 시간 따윈 주어지지 않았다. 남들은 ‘일주일에 고작 2면?’이라 말할 수도 있는 일인데도 어쩜 그리 치열한지 모르겠다.

  겨우 칼럼을 쓰려고 앉아보니 문득 먼 훗날 내가 이 시간을 기억할 수 있을 만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나 치열하게 살았는데 잊혀지면 너무 억울하니 말이다. 그래서 신문 한 칸을 빌려 조금 이르지만 네 학기,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신문사에 대한 소회를 해보고자 한다. 일기와 같은 성격의 글에 이만큼의 지면을 할애한다는 게 우습더라도 3학기 반 동안 신문을 만들어 왔고, 또 만들어갈 내게 이 정도의 자리는 허락될 터다.
나는 후회가 많은 사람이다. 미련을 타고나서 늘 가지 않은 길을 아쉬워한다. 후회하기보단 지금 있는 길에서 열심히 살아서 더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으면 될 텐데. 또 그러지는 못해서 후회만 하고 있다가 나중 가선 ‘그러지 말고 그 순간에 더 집중할 걸’하고 또 후회하는 것의 반복이다. 내가 지나온 삶의 길엔 항상 후회와 미련이 뒤엉킨 무언가들이 발자국처럼 남아있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언젠가부터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행동하는 습관이 생겼다. 그리고 또 후회했다. 나는 용기가 없어서 ‘후회하지 않는 일’만을 반복하고 있구나. 그만큼 내 삶에 주체성이 없구나. 이는 신문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엄청 고생스러운 것을 알기에 지원할 것이 망설여졌지만 지원도 안 해보고 떨어지면 후회될까 봐 신문사에 지원했다. 또 차장을 하지 않으면, 부장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될까 봐 신문사에 남기를 선택했다. 무언가 확신보다는 ‘후회하지 않기 위해’ 했던 행동들의 결산이 지금 신문사의 이 자리였다.

  그런데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란 이유도 자주 반복되니까 의문이 생겼다. 단순히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했던 일이라고 하기엔 신문사를 하면서 희생해야 할 것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신문사를 그만두면 ‘후회할’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그 답을 좀처럼 찾지 못하고 있다가 부장이 되고, 이제 정말 신문사의 끝을 상상할 수 있게 되니까 깨달았다. ‘후회할까 봐’라 말하면서 계속해서 신문사에 남는 것을 택했던 나는 오래전부터 이 신문사라는 공간을, 분위기를, 이곳을 구성하는 사람들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정치, 철학, 사회 등의 어디 가서 말하면 ‘분위기 깬다’는 말을 듣기 십상인 이야기들이 진지한 토론 거리가 되는 이 공간을 사랑했다. 그 ‘분위기 깨는 얘기’를 하기 위해 밤새 머리를 맞대고 치열하게 고민하는 게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사랑했다. 이젠 정말 아무런 맥락도 내용도 없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웃을 수 있는 동기들은 물론, 함께 신문을 만들어 나가는 모든 이들을 나는 사랑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중대신문에서 치열하게 면을 만들어가고 있는 나를 사랑했다. 사랑하고 있었다.

  ‘이걸 하지 않으면 후회될 것 같다’는 것은, 결국 그만큼 내가 그것을 사랑하고 열망하고 있었음을 의미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했던 행동은 결국 내 마음을 가장 충실히 따른 것이었다. 신문사 끝자락에 깨달은 것은 주체성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늘 내 마음이 말하는 바를 듣고 있었고, 떠밀리듯 선택했다고 생각했던 신문사는 그 수많은 희생에도 ‘선택하지 않으면 후회될’만큼 소중한 공간이었다는 것이었다.

  이걸 신문사가 끝나가는 지금 깨달은 게 아쉽기도 하고, 왜 이제야 깨달았는지 후회되기도 한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시작했고 지속해온 이 신문사에서, 이곳이 소중하다는 이유로 나는 오늘도 또 한번의 후회를 한다. 그렇기에 남은 기간만큼은 부디 그 무엇도 후회하지 않으면서 보낼 수 있기를 바란다. 먼 훗날의 내가 ‘아, 이러고도 또 후회했는데’라고 회상하지 않도록 말이다

저작권자 © 중대신문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