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으로 수놓은 스페인의 순간들
  • 김풀잎 기자
  • 승인 2017.11.06 2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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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도 미술관: 또 다른 세계의 이야기

유럽 여행의 묘미 중 하나는 유럽의 깊은 역사와 예술을 보여주는 미술관 혹은 박물관을 관람하는 것이죠. 예술에 조예가 없더라도 대규모의 미술관에 그려진 색색의 그림을 보면 이질적인 서구의 삶을 느낄 수 있다고 하는데요. 이번주에는 유럽 중에서도 스페인, 스페인을 대표하는 프라도 미술관에 가봤어요. 저기 고야의 동상과 고풍스러운 건물이 먼저 보이네요. 이곳을 가득 메운 수많은 그림 속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요. 그럼, 함께 끄덕일 준비 되셨나요?   

 

스페인을 떠올리면 뜨거운 태양과 산티아고 순례길, 축구, 플라멩고 등 다채로운 이미지가 연상된다. 다양한 문화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지난달 31일 열린 ‘2017 3차 창의인문독서 특강’에서는 프라도 미술관의 작품을 함께 감상하며 스페인의 역사와 문화를 굽어볼 수 있었다. 유럽의 3대 미술관 중 하나인 프라도 미술관은 스페인의 시작과 영광, 좌절까지 모든 시간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안현배 강사(성공회대 교양학부)가 ‘프라도 미술관, 또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주제로 강단에 섰다. 

 조금 다른 출발선

  로마의 멸망 이후부터 르네상스 이전까지의 시기인 유럽의 중세는 크리스트교라는 종교적 중심과 봉건제도라는 경제적 기반으로 이뤄진 시대다. 그러나 스페인 역사에는 중세 시대가 없다. 로마 세력이 물러간 뒤에 이슬람 세력이 확장됐기 때문이다. “당시 스페인은 이슬람에 의해 700년 동안 지배를 받았어요.” 안현배 강사는 지배의 흔적으로 알함브라 궁전을 보여줬다. 스페인 그라나다에 위치한 알함브라 궁전은 아라베스크 문양과 ‘사자(獅子)의 파티오’가 있는 전형적인 이슬람 양식의 건물이다. 

  이슬람의 지배는 스페인의 종교 발전을 가로막았다. 우상 숭배를 금기시하는 이슬람 문화 내에서 인물을 그림으로 그려내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유럽 예술의 한 축을 이루는 종교 미술은 생겨날 수 없었다. “이들에게 꾸밈의 방법은 오로지 이슬람 문화 양식인 아라베스크 문양뿐이었죠.”

  1492년은 스페인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해다.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가 혼인을 통해 부분적으로 존재했던 기독교 왕국을 통합하고 마지막 이슬람 왕국을 몰아냈다. 같은 해에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스페인에는 황금기가 도래한다. 새로운 왕국은 식민지 개척으로 유럽의 최강국이 되지만 여전히 예술은 발돋움하지 못했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과 예술의 등장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명성을 이룬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에겐 이 제국을 물려받을 단일혈통의 후계자가 없었다. 한 명의 아들과 네 명의 딸이 있었지만 아들과 큰딸이 단명했기 때문이다. 결국 로마제국의 합스부르크 왕가와 혼인한 둘째 딸 후우나의 아들인 카를 5세가 왕위에 오른다.

  카를 5세는 혼인 동맹의 결과로 출생과 동시에 오스트리아와 독일, 네덜란드, 스페인과 나폴리, 아메리카 대륙을 상속받았다. 일찍이 타국의 융성한 예술 문화를 경험한 그는 스페인의 문화 발전을 위해 유럽의 예술을 소개한다. 이 과정에서 스페인은 서양 문화 요소인 신화, 인체, 색채 등의 예술을 해외 작품을 보며 경험할 수 있었다.

  특히 로히르 반 데르 웨이덴의 「십자가 내림」은 인물 그림을 본 적 없었던 스페인 국민들에게 큰 자극이 됐다. “눈물을 흘리거나 찡그리거나 하는 다양한 표정들을 보며 스페인 사람들은 처음으로 감정의 동화를 경험했어요.” 이를 계기로 스페인은 종교 미술에 심취하게 된다. 

  스페인은 심미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작품뿐만 아니라 화가를 직접 초청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엘 그레코다. 엘 그레코는 어려운 그의 본명 대신 ‘그리스에서 온 녀석’이라는 뜻으로 스페인에서 그를 칭한 이름이다. 엘 그레코는 「라오콘」처럼 새로운 색을 사용해 종교적 신성함을 표현한 신비주의 예술로 유명하다. “그는 정돈되지 않은 스페인 예술 속에서 신비로운 종교 그림으로 인정받았어요.”

 

  스페인의 마음을 그리다

  예술에 눈을 뜬 스페인 국민들은 이제 그들만의 것이 담긴 그림을 보고 싶어 했다. 이 기대에 부응한 디에고 벨라스케스는 평생을 궁정화가로 지낸 스페인의 화가다. 그는 이상화된 인체만을 추구했던 과거 사조를 탈피해 친숙한 주변인물을 그렸다. 그러나 그가 궁정화가로 생을 보낸 이유는 따로 있다. 안현배 강사는 그가 루벤스를 동경함으로써 결핍을 느꼈다고 말했다.

  루벤스는 유명한 화가이자 숨어있는 외교관, 세련된 간첩으로 불렸다. 지식과 화술에 능통한 루벤스가 유럽 각국 왕의 초상화를 그리며 왕과 대화를 나눴기 때문이다. “마치 동네 미용실 원장님처럼 유럽 전역의 사정을 훤히 알 수 있었죠.” 루벤스와 달리 스페인어만을 구사할 수 있던 벨라스케스는 유럽에 진출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스페인의 자부심이었었다. 그 자부심은 그의 작품인 「시녀들(라스 메니나스)」에서 드러난다. 「시녀들」에는 거울에 비치는 왕과 왕비, 그들을 큰 캔버스에 그려 넣는 자신의 모습, 차례를 기다리는 공주의 모습이 담겨있다. 그는 캔버스 크기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궁정화가로서 받은 기사 작위 훈장을 강조했다. “이 기사 작위는 벨라스케스 옆에 있는 어린 공주가 커서 혼인한 이후에 받은 훈장이에요. 그림을 그리고 나서 나중에 이 훈장을 덧칠한 것이죠.”  

 

  좌절 속 빛난 검은그림

  프라도 미술관에서 벨라스케스의 그림들을 지나면 또 다른 스페인 화가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바로 프란시스코 고야의 작품이다. “고야는 현실 세계에 계산이 빨랐어요.” 궁정화가의 과정인 스페인 예술학교 진학에 실패한 고야는 이탈리아 유학길에 오른다. 고국에 돌아온 그는 스페인 내 인맥이 부족한 탓에 처음엔 작품 의뢰를 받지 못했지만 가격 흥정으로 이류 귀족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워커홀릭’답게 의뢰받은 그림을 빠르게 그려냈고 그 능력이 입소문을 타고 전해져 결국 궁정화가로 발탁된다. 

  행복도 잠시 스페인 역사는 고야에게 비극을 안겨준다. 지속적으로 무능한 통치가 이뤄진  결과다. 지배층만을 위한 식민지 운영은 귀족에게 향락을 가져다줬지만 다수의 국민은 빈곤에 허덕였다. 분열된 스페인은 프랑스에서 성장한 나폴레옹 세력에 의해 침략당하고 만다.

  이 시기 고야의 작품을 보면 그를 출세만을 추구한 인물로 보기는 어렵다. 고야가 전시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비인간적 폭력과 참극을 비판적 시각으로 기록했기 때문이다. 「1808년 5월 2일」은 스페인 시민들이 이슬람 군대를 동원한 프랑스 군대에 분노를 느껴 저항하는 그림이다. 바로 다음날인 「1808년 5월 3일」에는 저항의 결과로 마주한 마드리드 대학살을 비극적으로 표현했다. 

  ‘전쟁의 참화’는 강간, 살육의 장면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그는 전쟁을 경험하며 느낀 절망과 공포를 「아들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등의 ‘검은 그림’으로 표출했다. “고야가 스페인을 대표하는 예술가로 꼽히는 이유는 그림 실력보다도 그가 지배질서에 저항하며 보인 진정성 때문이에요.”  

  몇 점의 그림 속에서 한 나라의 역사와 한 사람의 삶을 느낄 수 있었다. 안현배 강사는 예술을 그 시대 사람들이 느낀 인간에 대한 성찰과 역사가 반영된 결과라고 정의했다. “예술만큼 그 시대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은 없을 거예요.” 어느 시대에서나 사람은 보편적 감정으로 어떤 형태로든 무언가를 표현한 예술 작품을 곳곳에 남겨놓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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