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셰는 자주 반복돼 진부해진 설정을 말합니다. 자주 쓰였다는 것은 그만큼 사 회적으로 당연시됐다는 것을 뜻하겠죠. 이번학기 문화부는 클리셰를 들여다보고 그 의미들을 파헤쳐 보려 합니다. 이번 주 클리셰는 바로‘모성애’입니다. 흔히들 모성애는 본능이라고 얘기합니다. 열달 동안 한 몸이었기에 어머니와 자식 간엔 아버지가 절대 알 수 없는 유대가 존재한다는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들려오죠. 하 지만 과연 모성애가 본능일까요? 왜 미디어에서 어머니는 숭고하거나 기이한 형태 로 드러날까요?

위 장면은 영화 [친정 엄마]의 한 장면으로, ‘엄마(왼쪽)’의 희생적이고 억척스러운 모습은 사회가 떠올리는‘어머니 상’의 표본이다
위 장면은 영화 [친정 엄마]의 한 장면으로, ‘엄마(왼쪽)’의 희생적이고 억척스러운 모습은 사회가 떠올리는‘어머니 상’의 표본이다

 

엄마라서 그래야 하고

엄마라서 죄가 된다
 

엄마도 아리따웠던 때가 있었겠지. 그 모든 걸 다 버리고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 엄마.”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가수 이설아가 부른엄마로 산다는 것은이란 노래에 한심사위원은이런 곡을 들고 나오면 반칙이다란 심사평을 남겼다. 모성애는 희생이나 사랑으로 치환되며 다른 무엇보다도 감성적인 부분으로 다뤄진다. 왜 어머니의 이야기는 항상 눈물을 자아낼까.

  여성은 모두 엄마가 됐다

  '지선한매의 긴장감 넘치는 대립구도가 인상적인 영화 <미씽>은 충무로에서 보기 힘든 여성 투톱 영화다. 영화 <비밀은 없다>연홍은 딸을 잃고 광기에 휩싸인 모습을 절절하게 전달하며 한국영화사의 새로운 얼굴로 남았다. 주인공 숙희의 액션이 돋보였던 영화 <악녀>는 여성 액션 장르를 향한 도전장이란 평을 받는다. 그러나 지선과 한매가 범죄를 일으키고 해결하는 동기도, 연홍이 실마리를 찾기 위해 자신의 손을 가위로 찌른 극단적인 행동도, 숙희가 목숨을 위협받는 킬러로 살아가는 이유도 모두 모성애에 뿌리를 둔다. 여성 주체가 무엇을 행하든 동기는 모성애에 국한돼 있었다.

  손희정 페미니스트 비평가는 그 원인으로 여성을 어머니와 동일시하는 관점을 꼽았다. “‘어머니가 아닌 여성에 관한 상상력이 부재해요. 사적 영역에 여성을 가둔 한국 사회에서 모성은 여전히 가장 강력하고 성스럽고 아름다운 판타지로 존재하죠.”여성에 관한 게으른 상상은 영화의 결말로 강력한 엄마의 사랑이외의 답변을 내놓지 못한다. 몰이해가 만든 신화 속에서 실존하는 여성은 모성을 본능으로 여길 것을 강요받는다.

  류웅재 교수(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는 여성에게 본능적으로 모성애가 존재한다고 보는 관점은 가부장제의 희망사항을 반영한 사회문화적 산물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 “돌봄은 성별과 상관없이 인간의 측은지심이 발현되는 부분이에요. 이를 단지 특정 젠더의 전유물로 고정하는 행위는 여성의 사회적 활동을 억압하는 행위로 이어질 뿐이죠.” 미디어 콘텐츠에서어머니일 때만 강해지는 것으로 묘사되는 여성의 모습은 여성을 가정에 속박시키는 기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희생적이게 아름답거나

  중견 여성 배우에게 자주 붙는 국민 엄마란 별칭. 이 단어는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어머니의 특정한 이미지가 존재함을 증명한다. 배우 김해숙에게 국민 엄마란 수식어를 얻게 한 영화 <친정 엄마>는 대중에게 어머니의 이미지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영화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이름도 명시되지 않은 채 엄마로만 불린다. 엄마는 한없이 희생적이다. 술에 취한 남편에게 맞으면서도 자식들 밥걱정이 우선이고, 엄마가 쪽팔린다는 딸주연의 말에도 웃으며 슬픔을 삼킨다. 서울에 상경한 주연을 보러 갈 때마다 주연이 어릴 적 좋아했던 황도를 챙겨주는 엄마에겐 딸이 유일한 자랑거리이다. 그러나 주연은 하고 싶은 게 없는 엄마가 얼마나 외로운 사람일지 안쓰럽기만 하다. “노래를 잘 하던 엄마는 가수가 되고 싶었을까”, “엄마는 나에게 끝없이 베풀기만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영화에서 지워진 엄마의 본래 이름처럼 영화엔 어머니가 아니던 시절의 엄마는 사라진 채 그냥 가족을 위하는 엄마만이 존재한다.

  ‘국민 엄마의 이미지로 알 수 있듯 대다수 콘텐츠에서 어머니는 항상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여성으로 그려졌다. 손희정 페미니스트 비평가는 미디어를 통해 사회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형성된 어머니상이 재생산된다고 설명한다. “미디어는 사회와 상호작용해요. 모성 신화나 모성 이데올로기가 자리 잡는 데엔 미디어가 큰 영향을 끼쳤죠. 미디어는 주체를 가진 인간으로서 어머니가 아닌 사회가 상상하고 추앙하는 모성의 화신으로서 어머니를 그려내고 있어요.”

  이기적이게 기괴하거나

  추앙받지 못하는 모성애는 비난받아 마땅한 것으로 격하된다. 가족을 위하지 않는 여성은 어머니로서 자격을 박탈당한다. 드라마 <밥상 차리는 남자>영혜는 자녀들이 성년이 된 후 남편에게 혼인 관계는 유지하되 간섭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살자며 졸혼을 요구한다. 영혜의 졸혼 요구에 돌아온 답은우리 생각은 안 하냐는 자식들의 질책이었다. ‘어머니가 아닌영혜로서의 삶을 살고자 했던 영혜의 소박한 바람은 이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희생하지 않는 어머니를 비난하는 분위기 속에서 어머니는 헌신을 기본으로 갖춰야만 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헌신은 사회에서 정상으로 받아들여지는 선에서만 가능했다. 광기의 모성애를 묘사하는 미디어콘텐츠는 순수하고 선한모성애만이 사회에서 용인될 수 있음을 명시한다. 드라마 <이름 없는 여자>지원은 아들 해성에게 골수를 이식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여리를 입양하는 이기적인 모성애를 보인다.

  지원과 여리의 갈등은 여리가 아이를 임신하면서 착한모성애와 나쁜모성애의 대결로 이어진다. 해성에게 골수를 이식하기 위해선 여리의 아이를 낙태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여리는 자식을 지키기 위해 낙태를 종용하는 지원에게서 도망가고 결국 골수 이식을 받지 못한 해성은 죽는다. 지원은 들끓는 복수심에 휩싸여 자신의 손자를 위한 골수기여자로 여리의 자식을 빼돌리기에 이른다.

  지원의 모성은 자식을 위해 필사적이라는 점에서 사회가 설정한 헌신적인 어머니신화와 맥락을 같이한다. 그러나 앞서 긍정적으로 묘사됐던 헌신적인 모성과 달리, 지원의 헌신은 비이성적이고 기이한 행동으로 묘사될 뿐이다. 같은 헌신적인 모성애라도 극단으로 해석돼 숭배 받는 동시에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여리가 지원의 친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지원의 모성애가 여리를 향한다는 드라마의 결말은 무조건적인 모성애가 낳을 수 있는 기이함만을 강조한다.

  손희정 페미니스트 비평가는 모성애를 희생적이지 않으면 이기적으로 정의하는 양상의 원인으로 모성을 향한 이분법적 사고를 지적한다. “모성애를 천부적이면서 남성이 이해할 수 없는 분야로 여기는 관점은 여성의 모성을 이분화 하죠. 사회가 원하는 방식의 모성애는 숭배 받지만 그렇지 않은 모성애는 여성을 혐오하기 위한 도구가 되는 거예요.”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려야하면서도 사회를 불편하게 할 정도로 이기적이게 굴어선 안 되는 어머니는 언제까지 화면 속에서 쓴 미소를 띠고 있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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