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희생은
어머니의 본능이 아니다
 
‘인형 옷 입히기’는 인형에게 자신이 원하는 옷을 입히는 놀이다. 인형이 입는 옷은 전적으로 옷을 입히는 사람에 의해 결정된다. 어떤 옷이 입혀지더라도 인형은 그저 미소를 띠고 있을 뿐이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모성애의 모습과 유사하다. 사회가 여성에게 ‘모성애’라는 옷을 입힘과 동시에 어머니는 미소 띤 자애로운 얼굴을 한 채로 사랑과 헌신으로 무장을 해야만 했다. 어쩌다 여성은 ‘모성애’라는 옷을 입게 됐으며 이는 여성에게 어떤 억압으로 작용했는지 전문가와 함께 분석해봤다.
 
  사회에 의해 만들어진
  모성애는 흔히 본능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엘리자베트 바댕테르의 『만들어진 모성』(동녘 펴냄)에 따르면 모성애는 본능이 아니라 근대가 발명한 역사적 산물에 불과하다. 18세기 프랑스에서는 유모 위탁이 관행처럼 행해졌다. 당시 아이를 도시 외곽 멀리에 있는 유모에게 보내는 풍조가 있었는데 다수의 아이들이 무관심과 비위생적인 환경에 의해 죽었다. 하지만 수많은 아이의 죽음에도 아이를 유모에게 보내는 관행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만큼 당시에는 육아에 대한 무관심이 사회 전반에 만연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변화했다. 생산 효율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중상주의 정책과 함께 노동력이 중요시되면서 육아의 중요성이 대두됐다. 한 명의 아이를 잘 키워내는 것은 곧 한 명만큼의 노동력이 증가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노동력을 보다 효과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여성들에게 모성애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추세는 루소의 『에밀』이 출간되면서 더욱 강화됐다. 『에밀』에서 저자 루소는 인간의 관습과 최초 교육은 여성들에게 달려있으며 자식을 교육하고, 돌보고, 마음을 달래주는 등의 행동이 여성의 의무라고 서술한다. 이런 논리는 곧 아이에게 사랑을 표시하지 않는 어머니를 ‘환자’로 취급하기까지 이르게 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시하는 모성애는 사회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한국의 헌신적인 어머니상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만들어졌다. 이택광 교수(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는 한국 사회에서 모성애가 중시되기 시작한 건 근대 사회로 진입하면라고 설명했다. 근대화론은 ‘남성은 노동, 여성은 남성의 휴식’을 맡는 게 바람직하다며 가정 내 역할 분담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부녀회, 어머니회 등이 생기기 시작했죠. 어머니가 아이를 위한 활동을 하는 것을 권장했고 이를 모성애라고 설명했습니다. 근대화와 관련된 경제개발의 일환이었죠.” ‘일하는 아버지와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라는 정형화된 모습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손희정 페미니스트 비평가는 한국 사회가 모성애를 강조하는 이유는 국가가 복지로 해결해야 할 역할을 여성에게 전가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국민 재생산을 여성의 노동력에 의지하면서도 여성에게 임금을 지급할 수 없을 때 사회는 출산과 육아가 여성의 본능이라고 말합니다. 사회가 불안정하고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을수록 모성을 강조하는 문화 콘텐츠가 많아지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죠.” 모성애를 여성의 부불노동에 대한 근거로 사용한 것이다.
 
  사회에 의해 희생된
  이렇게 만들어진 모성을 지속하기 위해서 사회가 선택한 전략은 ‘어머니는 위대하다’ 같은 찬양이었다. 서민 교수(단국대 의예과)는 모성 찬양이 여성을 육아에 전념하게끔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어머니를 찬양하는 나라일수록 여성의 권리가 낮아요. 모성 찬양은 여성을 육아에 묶어 놓으려는 술책이죠.” 어머니에 대한 찬양은 그저 빛 좋은 개살구였을 뿐이었다.

  『엄마의 탄생』(오월의봄 펴냄)에서 저자는 어머니 찬양은 곧 어머니 비난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이상적 어머니에 대한 예찬은 이상에 도달하지 못한 어머니들에게 이상에 이르도록 노력하라고 끝없이 채찍질한다. 이상적 어머니상에 부합하지 않는 여성을 향한 ‘너는 왜 이상적이지 못하냐’는 비난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엄마 손이 덜 간 아이들은 어떻게든 티가 난다’는 말은 이상에 다다르지 못한 어머니들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보여준다. 온전히 자식에게 헌신하는 여성을 찬양하는 풍조는 일하는 어머니들에게 부족한 어머니라는 낙인을 찍고 있었다. 맞벌이하지 않으면 생계가 유지되지 않는 환경 속에서도 어머니들은 자신이 일을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쁜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은 이뿐만이 아니다. 엄마(Mom)와 벌레(蟲)를 합성한 신조어 ‘맘충’은 헌신과는 별개로 아이와 집 밖에 나온 모든 어머니를 비난의 시선으로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서영표 교수(제주대 사회학과)는 사회 변화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를 여성에게 전가하기 위해 ‘맘충’이라는 단어가 사용된다고 설명했다. “과거 가족과 마을이 제공했던 놀이와 집합적인 돌봄의 상실은 새로운 놀이와 돌봄의 집합적 형태로 대체돼야 합니다. 하지만 경쟁적인 자본주의에 의해 가로막혀 있죠. 이는 분명 사회의 문제지만 우리 사회는 해결의 의지도, 계획도 없습니다. ‘맘충’이라는 기표는 이걸 가릴 수 있는 아주 손쉬운 선택이죠.” ‘맘충’은 현대사회로 인해 발생한 여러 문제를 덮기 위해 사회가 만든 단어이고, 어머니는 희생양일 뿐이었다.
 
  여성만이 아닌 모두의 역할
  어머니와 모성애의 숭고함은 당연한 것으로 인식돼 왔다. 하지만 이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 아니라 여성을 억압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 이택광 교수는 모성애에 대한 인식이 변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모성애가 허구였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더 이상 어머니의 희생에 모든 짐을 맡겨서는 안 되죠.”
 
  이젠 사회가 발명한 모성애라는 통념을 잊고 새로운 인식을 만들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서영표 교수는 육아는 사회 전체가 책임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어머니에게만 강요됐던 육아는 어머니, 아버지, 공동체 그리고 정부에 의해 분담 돼야 합니다. 어머니도 어머니이기 이전에 인간이며 자신의 삶과 목적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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