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거운 전공 강의와 달리 교양 강의는 특별한 느낌이 있어요. 다른 전공의 학생들을 만나 전공을 벗어난 다양한 이야기가 가능하죠. 그래서인지 인기 많은 교양 강의는 수강 신청 때마다 불꽃 튀는 클릭 전쟁이 일어나곤 하는데요. 연세대에서도 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한 교양 수업이 있다고 합니다. 이번주에는 우리 모두의 유일한 공통점인 ‘인간 존재’를 주제로 한 이 교양 수업을 살짝 엿들어 봤어요. 전공이나 성격 등과 무관하게 인간이라면 한 번쯤 해볼 법한 고민이죠. 인간인 나는 누구이고 어떤 존재일까요? 그럼, 함께 끄덕일 준비 되셨나요?

 

  지난 12일 교보문고 광화문 컨벤션에서 ‘365 인생학교’가 주최한 『위대한 유산(벼룩에서 인공지능까지 철학, 과학, 문학이 밝히는 생명의 모든 것)』(아르테(arte) 펴냄) 저자 강연회가 열렸다. 『위대한 유산』은 연세대에서 7년간 열린 교양 강의를 엮은 책이다. 이 강의는 김응빈 교수(연세대 시스템생물학과), 서홍원 교수(연세대 영어영문학), 조대호 교수(연세대 철학) 세 교수의 혁신적인 코티칭(Co-Teaching) 방식으로 학문의 유기적 융합을 이룬 명강의로 꼽힌다. 책에는 학문의 경계를 허문 채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인간다움’에 관한 세 교수의 생각이 담겨있다. 이날 강연에서도 세 교수는 각자의 전공을 중심으로 ‘호모사피엔스 다시 보기’라는 주제에 입을 맞췄다.

 

  김응빈 교수(연세대 시스템생물학과): 인간의 시스템

  “시스템생물학과 교수로서 저는 인간을 시스템으로 봅니다.” 김응빈 교수의 강연이 시작됐다. 인간은 인체 시스템으로 구성된다. ‘시스템’은 여러 부분이 전체로서 기능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병원에서는 인체의 하부 시스템을 기준으로 분과를 나눠 소화기내과, 흉부외과, 신경외과 등으로 부른다. 인체는 이 각개의 시스템이 서로 소통하며 운영해 조화를 이룰 때 가장 건강하다. 

  그렇다면 인체의 하부 시스템은 어떻게 소통하고 있을까. 김응빈 교수는 인체 시스템의 운영원리를 생명체의 세포를 조절하는 ‘단백질-단백질 상호작용’으로 설명했

 

다. 단백질 분자는 세포 내부의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세포 외적 정보를 세포 내부로 전달한다. 이때 정보의 전달은 세포 외부의 호르몬 결합부터 핵 내부에서의 신호전달 과정 등을 포괄하는 ‘신호전달체계’에 의해 이뤄진다. 세포는 이렇게 전달된 정보로 상황에 적합한 생체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사진은 2008년에 슈퍼컴퓨터를 이용해 단백질을 점으로, 단백질 간의 상호작용을 선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수많은 상호작용을 통해 인체는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인체 시스템은 스스로 작동할 수 없다. 시스템을 통제·제어하는 운영 주체는 따로 있다.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인 리처드 도킨스는 생명의 본질을 ‘DNA 유전자’라고 말했다. DNA는 한 생명을 구성하는 모든 유전 정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인체 시스템의 운영 주체를 DNA라고 볼 수 있을까요?” 김응빈 교수는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DNA 속 유전 정보가 발현되면 개인의 정체가 형성되지만, 이 과정을 보면 DNA가 인체 시스템을 운영한다고 보긴 어렵다. 유전 정보의 발현이 나타나는 생체 반응은 특정 단백질의 DNA 결합으로부터 시작된다. DNA만으로는 어떤 반응도 발현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김응빈 교수는 DNA와 결합할 수 있는 단백질의 역할을 강조했다. “어떤 단백질이 언제 어느 DNA와 결합하는지에 따라서 인체 반응이 결정돼요.”

  게다가 인간의 몸은 인간 한 명의 것으로 볼 수 없다. 한 인체에는 2~3kg에 달하는 미생물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거냐면 개체 수로만 따지면 인간과 미생물 세포 간 싸움이 일어난다면 인간은 9대 1의 싸움을 치르는 정도에요.” 심지어 생물학적으로 인간이 이 싸움에서 제어할 수 있는 부분은 없다. 김응빈 교수는 인간이 혹시 미생물을 위해 주어진 이동주택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종종 든다고 말했다. 

  인체 시스템은 분명 인간을 구성하지만 이 시스템을 운영하는 주체는 생물학적 접근으로 알 수 없다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다시, 인간은 무엇이며 누구인가. 김응빈 교수는 여전히 물음을 남긴 채 마이크를 넘겼다.

 

서홍원 교수(연세대 영어영문학): 상상 속의 인간

  “저는 상상 속에서 인간을 찾아보려 합니다.” 서홍원 교수가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인간 정체성이 희미해지며 느끼는 두려움은 비단 오늘날만의 감정은 아니다. 과거부터 문학작품 속 상상의 기반이 됐기 때문이다. 

  1818년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을 출간했다. 생명 연구에 몰두한 과학자 프랑켄슈타인이 생명의 원인을 밝히는 동시에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는 능력을 가지게 된다는 내용이다. 그는 시체 안치소에서 시체 일부를 부품삼아 조립해 새로운 생명체를 탄생시킨다.

  ‘I saw the dull yellow eye of the creature open; it breathed hard, and a convulsive motion agitated its limbs.’ 원작 소설에서는 이 창조물을 ‘creature’ 또는 ‘it’으로 지칭한다. 그를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한편 숨을 내뱉는 과정을 묘사하며 ‘breathed’라고 표현해 숨을 쉬는 ‘생명체’로는 인정한다. 인간의 신체로 만들어졌고 숨도 쉬지만 인간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생명체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막상 소설 속 삽화를 보면 본인이 창조한 ‘생명체’를 바라보는 프랑케슈타인 박사의 표정은 생명 탄생의 기쁨보다 두려움이 앞서 보인다. 이는 창조의 책임이 부재한 결과다. 상상의 영역인 소설에서조차 인간이 창조의 책임을 질 수 있는가를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소설 속에서 이 생명체는 ‘괴물’로 불린다. 이에 서홍원 교수는 회의적으로 말했다. “괴물을 창조한 인간은 괴물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허무맹랑한 듯했던 상상은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산업혁명에 도입된 컨베이어 벨트는 노동의 분업화로 이어졌다. 공장 기계의 부품처럼 노동자가 한 가지 기능만을 하는 것이다. “부품화된 인간은 프랑케슈타인의 조립 과정처럼 하나씩 분리·결합될 수 있어요.” 나아가 인간은 피조물에서 창조자인 호모 파베르(Homo Faber)로 진화했다. 절대자가 인간을 창조했다는 과거의 믿음이 사라지자 자연을 통제하는 과학 기술은 발전을 거듭했고 오늘날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의 등장까지 이르렀다. 

  서홍원 교수는 인공지능의 단어 조합에 주목했다. ‘지성(Intellect)’은 다른 생명체와 구분되는 인간의 고유 능력으로 간주된다. 육감과 유사하며 정확히 표현할 수 없지만 이성과는 구분된다. 가령 신의 존재를 이성적으로 알 순 없지만 지성으로는 느낄 수 있다. 그래서 Artificial(인공)과 Intelligence(지능)의 결합은 부조화를 이룬다. “기계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을 구분하지 못한 채로 발전 가능성만을 바라보고 있는 모양새죠.”

  실제로 인간은 2005년 DNA를 가진 최소 세포를 만드는 등 ‘준창조’를 실현하고 있다. 서홍원 교수는 상상과 현실의 경계 속 인간에게 또다시 물음을 던졌다. “인간과 유사한 생각을 하지만 쇠로 만들어진 존재는 인간이 아닐까요? 살과 피로 만들어졌지만 이들과 유사한 생각을 하는 인간은 인간일까요?”

 

조대호 교수(연세대 철학): 기억하는 인간

  조대호 교수가 앞선 두 교수가 남긴 무거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강단에 섰다. “인간은 기억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는 짧고 명료하게 모든 질문에 답했다. 기억을 가진다는 점에서 사람은 인공지능과도, 동물과도, 세포와도, 구분된다는 주장이다. 조대호 교수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람의 기억이 가진 세 가지 특징을 제시했다. 

  먼저 사람의 기억은 주관적이고 부정확하고 감정적이다. 기억은 종종 잊히거나 되찾을 수 있고 같은 경험도 서로 다른 기억으로 남는다. 이 세 가지 특성은 ‘비이성’으로 엮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을 가진 인공지능은 존재할 수 없다. 감정적으로 작동하는 기억을 인공지능이 가지게 되면 감정적인 가치 판단이 이뤄져 정보의 편향과 부정확한 작동을 초래한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더는 이성적 논리에 기초해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기계가 아니다. “엉뚱한 실수와 상상은 기억을 가지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자부심이죠.”

  두 번째로 사람에게는 ‘추리 기억’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많은 동물이 기억과 학습에 참여하지만, 인간 이외에 어떤 동물도 상기하는 능력이 없다’고 말했다. 기억은 자극에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연상 기억과 의식적으로 기억을 상기하는 추리 기억으로 나뉜다. 추리 기억은 비이성적인 내용으로 구성됐을지라도 이를 상기하는 방법으로써 이성적인 추론 과정을 요구한다. 이성을 가진 인간만이 추리기억을 가질 수 있는 이유다.

  “우리의 삶은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요.” 조대호 교수는 기억이 우리 자신을 결정한다고 덧붙였다. 사람은 자신의 습관과 욕망, 꿈 등을

추리 기억으로 구성하기 때문이다. 영국 철학자 흄 역시 ‘인간의 자아는 기억의 다발에 불과하다’고 말한 바 있다. 기억 곳곳에 잠재하는 삶의 순간들은 남과 다른 고유의 자아를 구성한다. 생물학에서 찾지 못한 인간의 운영 주체는 DNA가 아닌 기억이 규정한 자아였다.

  그렇다면 인간은 기억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기억의 마지막 특징은 ‘퇴행하는 기억’과 ‘창조하는 기억’이 있다는 점이다. 변하지 않는 순간으로 고정된 채 존재하는 퇴행하는 기억과 동시에 새로운 기억과 결합하고 변화돼 새롭게 창조되는 기억이 존재한다. 

  조대호 교수는 ‘말랑말랑’한 기억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영감을 불어넣는 예술의 여신 ‘뮤즈(muse)’의 어머니는 ‘므네모시네(Mnemosy-ne)’, 기억의 신이다. 기억은 상상 속에서 재구성돼 영감으로 작용한다. 작가의 기억이 소설의 바탕으로 재구성되며 영감을 주는 원리다. 개인의 삶에서도 기억의 재편은 자신이 원하는 자아를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나였던 그 아이는 어디 있을까 아직 내 속에 있을까 아니면 사라졌을까’ 파블로 네루다의 『질문의 책』 속 한 구절에 기억의 특성이 나타난다. 사람은 과거의 자신과 오늘날의 자신 그리고 미래의 자신까지 기억을 매개로 하나로 가지는 유일무이하며 전무후무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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