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려진 본질 위
싸우는 여성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 중 가장 막강한 권력을 가진 헤라. 하지만 제우스의 끊임없는 불륜에 골머리를 앓는 그의 모습을 떠올리며 사람들은 그를 ‘질투의 화신’이라 부른다. 그의 모든 처사 또한 질투로 함축되고 그 대상은 제우스의 불륜 상대에게 한정된다. 제우스의 권력이 절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제우스 옆의 여성만을 응징할 수밖에 없던 헤라의 사정은 질투라는 이름 아래 가려질 뿐이었다.

  작은 파이 위의 결투
  인터넷 커뮤니티 속 여성의 외모를 평가하는 글엔 ‘여적여 어디 안 가지’, ‘진리의 여적여’, ‘여적여는 과학이다’ 등의 댓글이 달린다. 외모를 평가한 사람이 여성이란 근거는 어디에도 없지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대결 구도를 여자 대 여자로 설정한다. 다양한 갈등이 존재하는 사회 속에서 유독 여성 간의 갈등은 갈등 주체가 ‘여자’임에 초점이 맞춰진다. 질투와 갈등은 성별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감정임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여성 간의 갈등만이 ‘여자의 적은 여자(여적여)’란 프레임으로 소비된다.

  ‘여적여’ 프레임 속 여성 간의 갈등은 공적인 상황보다 가정이나 연인관계 같은 미시적인 상황에서 다뤄진다. 작은 집단에서 벌어지는 여성의 갈등은 늘 사소하고 치사한 행위로 읽힌다. 박경태 교수(성공회대 사회과학부)는 여성 간의 갈등이 열등하다는 식으로 묘사되는 이유가 ‘남은 권력’을 두고 벌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사회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고민하고 결정하는 권한은 남성에게 있었어요. 주변부에서 밀려난 여성은 사소한 일만 할 수 있었죠.” 여성이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시장이 애초에 미시적인 부분에 국한됐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권력다툼이 남성에게 한정되는 이유는 사회구조에 있다. “가부장제를 기본으로 하는 사회에서 권력은 남성에게서 비롯돼요. 과거에 여성의 권력은 전적으로 능력 있는 아버지 또는 남편, 혹은 자신이 낳은 아들로부터 기인했죠.” 이나영 교수(사회학과)는 핵심적인 역할이 남성에게 돌아가는 원인으로 남성중심적인 위계 구조를 꼽았다.
 
  그는 ‘여적여’라는 프레임의 존재 자체가 모든 권력이 남성으로부터 나옴을 방증한다고 설명한다. “여자의 적을 여자로 보는 프레임은 ‘여성은 남성과의 경쟁이 불가능하다’는 걸 시사해요. 남성에게 선택받아야만 권력을 취할 수 있는 구조에서 여성에겐 부스러기 권력만이 주어지고 있음을 인정하는 거죠.” 남자와의 권력다툼 자체가 어려운 구조로 인해 여성의 경쟁대상은 자동적으로 같은 여성을 향했다. 조신한 여성을 요구하는 가부장제 위에서 여성은 적은 몫을 두고 더 치열하고 눈에 띄지 않는 경쟁을 치러야만 했다.
 
  내 갈등을 옳고 네 갈등은 틀리다
  눈에 띄지 않는 경쟁은 쉽게 왜곡되고 재단 당했다. 사회는 ‘여성은 감성적’이라며 여성 간 갈등의 원인을 시기·질투로 함축했다. 역사적 증거로 조선 시대에 아내를 가정에서 내쫓을 수 있는 조건이었던 ‘칠거지악(七去之惡)’을 들 수 있다. 칠거지악은 질투를 하는 여성은 축첩제도 유지를 방해하고 가족공동생활의 불화가 된다고 설명한다. 철저한 유교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른 여성과 갈등하는 여성은 사사로운 질투로 불화를 만드는 악으로 정의됐다.

  최은경 교수(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는 ‘여적여’ 프레임에 유교적 문화의 잔재가 남아있다고 말한다. “프레임이 사용되는 맥락을 살펴보면 조선 시대의 가부장제가 21세기에도 중요한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어요. 여성을 미성숙한 존재로 설정해 지나치게 감성적이고 비합리적으로 그려내죠.” 오랫동안 남성을 기준으로 해온 사회에서 열등하게 묘사되는 여성 간 갈등은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해방운동을 거치면서 여성의 법적 권리가 보장되기 시작했지만 여성 간 갈등을 향한 인식은 제자리걸음을 반복했다. 오히려 공적인 영역에 진출한 여성 간의 갈등까지 ‘여적여’란 프레임 안에서 소비됐다. 이나영 교수는 여성 간의 갈등을 침소봉대(針小棒大)하는 사회의 일면에 문제를 제기했다. “개인과 개인 간에 갈등은 존재할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한국사회에서 여성 개인 간의 문제는 여성 집단 전체의 문제로 환원돼 다뤄지죠.” 사회집단 안에서 공적인 역할을 맡는 여성이 소수임을 고려하면 개인 여성들의 갈등을 함부로 집단화하는 행위가 얼마나 큰 왜곡을 양산할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서민 교수(단국대 의예과)는 ‘여적여’ 프레임이 의도하는 왜곡이 여성이란 소수자를 향한 조롱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여적여’란 프레임 자체에 여성을 깔보는 의식이 있어요. 남성이 기준이 되는 사회에서 여성을 가볍게 소비하는 행위가 기득권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여적여’ 프레임은 권력층에게 영향을 주지 않기에 사려를 거치지 않고 남용된다는 것이다.
 
  그들의 적은 그 뒤에 있다
  ‘여적여’ 프레임 안에 갇힌 사람들이 초래할 결과는 무엇일까. 이나영 교수는 ‘여적여’ 프레임이 성차별을 정당화하는 기제가 된다고 말했다. “개인의 문제가 집단의 문제로 여겨지면 ‘여자는 이래서 안 돼’란 논리 구조가 생겨요. 이는 사회진출 과정에서 여성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사고방식의 근간이 되죠.” 정당화된 성차별은 여성을 다시 남성의 권력에 기생해서 살아가는 존재로 남게 한다.
 
  최은경 교수는 ‘여적여’ 프레임이 여성의 성질을 정의 내리려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단순히 여성을 이해하지 않으려는 태도에 불과하다고 역설한다. “여성 간의 갈등을 과장하고 왜곡해서 여성을 상상 속에 가둬두고 있어요. 여성에 관한 부족한 이해는 궁극적으로 여성 혐오로 이어져 막대한 사회비용을 가중하죠.”
 
  박경태 교수는 ‘여적여’ 프레임이 소수자 혐오의 본질을 흐리기 위해 소수자 간의 갈등을 당연하고 열등한 것으로 세뇌한다고 언급했다. “여성 스스로도 남성중심사회에서 남성중심주의 사고방식을 답습해 다른 여성을 열등하게 바라볼 수 있어요.” ‘같은 여자지만’으로 시작하는 여성에 대한 판단이 ‘여적여’ 프레임에 갇힌 사고는 아닌지 고찰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여적여’ 프레임이 의미하는 실제 적은 따로 있다고 말한다. “실제 적은 불평등한 사회를 유지하려는 구조에요. 구조에 대항하지 못하는 여성은 스스로를 적으로 돌리게 되죠. 남성중심주의를 버리는 것이 필요해요.” 적으로 제시된 여자보다 여자를 적으로 제시한 사회에 초점을 맞출 때 비로소 남성중심주의를 탈피하는 한 걸음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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