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리셰는 자주 반복돼 진부해진 설정을 말합니다. 자주 쓰였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적으로 당연시됐다는 것을 뜻하겠죠. 이번학기 문화부는 클리셰를 들여다보고 그 의미들을 파헤쳐 보려 합니다. 이번주 클리셰는 바로 ‘여자의 적은 여자(여적여)’ 입니다. 수많은 콘텐츠에서 여성캐릭터는 질투하며 서로를 적대시하는 존재로 그려져왔죠. 미디어 속에서 여성이 ‘여적여’구도로 묘사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과연 여성의 적은 여성일까요? ‘여적여’ 클리셰를 분석해봤습니다.
 
일러스트 황예나

여주인공은 여전히
과거에 갇혀있었다


‘질투심과 시기보단 됨됨이를 알아주는’ 방탄소년단의 ‘Miss Right’라는 노래 중 한 소절이다. 이런 가사와 같이 콘텐츠 속에서 여성에게 질투는 당연한 것처럼 따라붙는다. 여성 인물들은 대부분 질투로 다른 여성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맺는 식으로 묘사된다. 콘텐츠에서 여성은 왜 이런 모습으로 표현되는걸까. 드라마 <아내의 유혹>과 영화 <여교사> 분석을 통해 알아봤다.

  갈등은 남자를 싣고
  드라마 <아내의 유혹>은 ‘구은재’와 ‘신애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두 여성은 어렸을 때부터 한집에 살며 친하게 지내왔으나 ‘정교빈’의 등장 이후 사이가 급격하게 틀어진다. 정교빈은 구은재에게 반해 그녀를 계속 쫓아다니면서 억지로 임신시키고 심지어는 결혼을 안 하면 죽어버리겠다는 협박까지 일삼아 구은재와 결혼에 이른다. 하지만 정교빈에게 푹 빠진 신애리는 구은재를 질투하며 온갖 수를 써서 정교빈을 유혹하고 끝내 이혼하게 만든다. 그뿐만 아니라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정교빈과 도모해 오랜 기간 친구였던 구은재를 죽이려고까지 한다. 

  신애리는 사랑, 그리고 그에 따른 질투만으로 오래전부터 친했던 친구를 배신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까지 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콘텐츠에서 여성 간 갈등의 원인은 주로 시기·질투 등의 사적인 감정으로 묘사된다. 남성 간의 갈등이 주로 공적인 목표를 중심으로 묘사되는 것과는 확연히 대비되는 모습이다. 

  김강원 강사(국어국문학과)는 여성 간 갈등이 사적인 감정 위주로 묘사되는 원인을 과거 한국 사회의 특성에서 찾았다. “드라마의 주된 시청자는 여성입니다. 드라마는 현실에 있을 법한 이야기를 해야 시청자로부터 공감을 자아낼 수 있죠. 과거 한국 사회는 지금보다 더 남성에게 권력이 집중돼 있었기에 여성의 사회경험이 빈약했습니다. 그렇다보니 공적인 목표에 따라 행동하는 여성은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자아내지 못하는 판타지에 가까웠던 거죠.”

  구은재는 정교빈과 신애리의 음모에서 간신히 살아나 ‘민소희’라는 이름으로 다시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망가뜨린 정교빈과 신애리에게 복수를 하기로 다짐한다. 민소희는 신 애리의 결혼생활을 무너뜨리고 정교빈이 자신에게 한 만행을 밝히기 위해 그를 유혹한다. 신애리는 그런 민소희를 보면서 위기의식을 느낀다. 이후 이야기는 정교빈을 사이에 둔 민소희와 신애리 간의 신경전이 주를 이룬다. 
 
  두 여성은 자신만의 사업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즉 재정적으로도 사회적 지위로도 부족함이 없는 여성들인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두 여성의 갈등을 이끌어나가는 가장 큰 동기는 ‘정교빈’이었다. 신주진 평론가는 여성의 갈등이 남성 중심으로 묘사되는 대표적인 이유로 가부장제를 꼽았다. “가부장제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에서 여성의 활동영역은 가정에 국한돼 있었죠. 당시 여성 간의 갈등은 주로 남자를 둘러싼 본처와 첩의 갈등이었어요. 이 구시대적인 프레임이 현대까지 그대로 내려온 거죠.” 비판 없이 수용한 낡은 프레임은 심지어 여성을 ‘잘나가는 직장인’으로 묘사할 때조차 그대로 이어졌다.
 
  ‘여자라서’ 일어난 갈등은 없다
  영화 <여교사>는 여교사인 ‘효주’와 ‘혜영’의 대립 관계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학생인 재하와 혜영의 부적절한 관계를 우연히 목격한 효주는 이를 빌미로 혜영을 협박한다. 그와 동시에 효주는 재하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이내 재하를 사랑하게 된다. 결국 혜영과 똑같이 재하와 부적절한 관계로까지 발전한 효주.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자신을 협박하는 효주를 골탕 먹이려는 혜영의 계략이었고 재하와 혜영은 아직도 만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효주는 혜영의 아버지인 이사장에게 혜영과 재하의 부적절한 관계를 말하지만, 오히려 자신만 재계약 대상에서 제외되는 등의 피해를 입는다. 결국 효주는 혜영에게 용서를 구하고 최대한 혜영의 비위를 맞추려 든다. 
“그 핏덩이 같은 애를 어떻게 사랑해.”, “근데 언니 정말 재하 사랑했어?” 하지만 재하와의 관계는 가벼운 감정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했다며 재하와의 관계에 모든 감정을 바쳤던 효주를 비웃는 혜영에 격분한 효주는 끝내 혜영을 살해하고 만다.
 
  영화 <여교사>는 두 여주인공끼리 남자를 두고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어 전형적인 ‘여적여’ 구도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엔 효주와 혜영의 관계가 단순히 사랑을 기반으로 한 시기와 질투라고만은 단정 지을 수 없는 맥락이 존재한다.
 
  계약직 교사라는 신분에서 오랜 노력과 기다림 끝에 정규직 교사가 될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효주와 자신의 능력이 아닌 이사장인 부모의 능력으로 너무나 쉽게 효주의 차례였던 정규직 교사의 자리를 차지한 혜영의 입장은 극명하게 대비된다. 이러한 상황 속 그나마 효주가 혜영의 우위에 설 수 있는 수단이 재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효주는 그 재하조차 가질 수 없었다. 계급적 차이로 인해 효주가 그렇게 바라도 얻을 수 없던 모든 것들이 혜영에겐 너무도 쉬웠다.
 
  영화에 등장하는 이런 맥락들을 고려할 때 혜영과 효주의 관계를 ‘여성은 질투심이 심해서’, ‘남자 때문에’로만 해석하는 것은 편협한 시각이다. “남성 간 갈등에는 다른 여러 가지의 구도와 측면을 바라보는 것에 반해 여성 간 갈등은 단지 갈등 주체가 여성이라는 것만 보게 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이는 여성 인물이 소위 ‘조신’하지 않고 싸우거나 악한 모습을 보이는 걸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죠.” 신주진 평론가는 여성 간 갈등은 갈등 주체가 여성이란 이유만으로 색안경을 끼고 보는 건 합당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판타지는 이제 그만
  “세상이 변했다. 요즘 주체적인 여성이 주목받는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동등하게 사랑을 가꾸는 이야기를 만들도록 공부하고 변하도록 하겠다.” 지난 25일 열린 ‘제6회 이데일리 W페스타(세계여성포럼2017)’에서 김은숙 작가가 한 말이다. 시대가 콘텐츠 속의 여성이 더 주체적으로 변화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김강원 강사는 최근 이러한 요구를 반영한 콘텐츠가 증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요즘 콘텐츠의 여성은 변화하고 있습니다. 여주인공의 감정이나 행동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기도 하고 여주인공이 좀 더 풍성하고 입체적으로 그려지고 있죠.” 시대는 변하고 있다. 이젠 남성에 의해 휘둘리기만 하는 여성이 오히려 ‘판타지’에 가깝다. 이젠 과거에 형성된 프레임을 그대로 콘텐츠에 옮겨와서는 안 된다. 변한 시대상을 담아낼 새로운 시각이 부상하고 있다. 판타지가 아닌 주체적인 여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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