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미동 없이 강의를 듣고 있는 당신, 그 굳어버린 얼굴에서 지루함과 어려움이 고스란히 드러나네요. 오늘만큼은 신나게 고개를 끄덕이며 흥미롭게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어요. 조금 어렵게 느껴진다면 우리 같이 차근차근 들여다보죠. 그럼 낯선 내용이더라도 끄떡없이 끄덕끄덕, 할 수 있을 거예요. 이번주에는 주디스 버틀러의 저서 『혐오 발언』의 내용을 대한민국 현실에 비추며 읽어봤어요. 혐오와 혐오, 그 경계 속 우리는 어디에 서야 할까요. 그럼, 함께 끄덕일 준비 되셨나요? 

 

  “아, 언니 생각해 보아요. (…) 우선 우리는 남자들과 싸워서는 안 되는 여자로 태어났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해요. 둘째로 우리는 우리보다 강한 자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이 일만이 아니라 이보다 더 쓰라린 명령에도 복종해야 합니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 중 이스메네의 대사다. 국법으로 금지된 오빠의 장례를 치러주겠다는 안티고네의 결심을 동생 이스메네가 회유하는 장면이다. 이스메네의 말로 안티고네의 불복종이 당시 얼마나 혁신적인 행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구조주의 페미니즘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에게 안티고네는 사유의 ‘뮤즈’였다. 안티고네의 해방적 삶에서 혐오 발언에 대항할 용기를 포착했기 때문이다. 지난 22일 권명아 교수(동아대 한국어문학과)가 ‘주디스 버틀러: 혐오 발언’을 주제로 강단에 섰다.

 

  거부, 저항의 시작

  안티고네는 버틀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 여성인 안티고네가 남성 권력을 가진 크레온의 말에 불복함으로써 소위 이분법적인 젠더 체계가 붕괴된다. 극 중 크레온은 “그녀가 이기고 그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면, 내가 아니라 그녀가 남자일 것이오”라고 말한다. 당시 안티고네의 행동은 여성의 ‘속성’을 벗어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버틀러는 안티고네를 젠더화된 주체화 모델을 거부한 인물로 바라본다. 버틀러가 생각하는 젠더는 애초에 속성이 아니라 선택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속성이라 여기는 젠더는 사회가 규정한 모습을 따르는 ‘주체화’의 산물에 불과하다. 

  게다가 그녀는 강력한 국법마저 어긴다. 하지만 국가의 명령을 거부하고 오빠의 장례와 자신의 죽음을 선택한 그녀를 비난할 근거는 빈약하다. 오히려 국가가 개인의 정서를 무시한 채 법과 권력을 폭력적으로 강요했다고 볼 일이다. 국가 권력이 절대성을 가질 때 개인에게 발생할 수 있는 문제가 드러난다. 

  안티고네는 누군가에 의해 규정된 행위들, 여성으로서 그리고 국민으로서 응당 취해야 하는 태도를 거부한 인물이다. 그 결과 누군가 원하는 정체성이 아닌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할 수 있었다. 안티고네 이야기는 누구나 개인이 부여받은 수행을 거부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 지점에서 버틀러는 혐오 발언을 거부할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꽃이 되지 ‘않을 수 있다’

  혐오 발언은 대개 ‘상처’를 주는 말로 구성된다. 그래서 혐오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피해자’, ‘약자’ 등으로 불린다. 이 단어들은 혐오 발언의 발화자가 상대적으로 ‘가해’를 끼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강자’라는 점과 혐오 발언에는 피해가 수반되는 점을 전제한다.

  버틀러는 혐오 발언의 대상자가 취약하다는 전제 자체가 잘못됐다고 말한다. 취약성은 일부의 표지가 아니라 인간 모두가 가진 조건이다. 모든 인간은 상호 의존적으로 침해하고 침해당하며 존재하기 때문이다. 

  혐오 발언에 전제된 권력 관계를 지우고 나면 혐오 발언의 효과성을 재고할 수 있게 된다. 혐오 발언이 항상 작동할 것이라는 가정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발화자가 상처를 의도한 말이 반드시 의도대로 발휘되는 건 아니다. 버틀러는 알튀세르의 ‘호명 이론’을 재해석함으로써 혐오 발언이 의도대로 이행되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호명 이론은 주권을 가진 이의 지배적 언어에 의해서 주체가 수동적으로 구성된다는 이론이다. 예를 들어 의사가 태어난 아이에게 ‘여자아이입니다’라며 호명하는 동시에 아이는 여성의 속성을 띄며 성장한다. 

  하지만 버틀러는 주체가 반드시 호명에 따라 구성되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여러 아이에게 여자아이라는 같은 호명을 반복해 부과하더라도 그 결과는 달라질 수 있다. 버틀러의 호명은 호명에 반응하는 행위로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안티고네는 여성, 국민이라는 호명에 반응하지 않음으로써 크레온의 호명을 무력화시켰다.

  혐오를 의도한 발화 또한 혐오를 당하는 인물의 반응으로 완성된다. 즉 상처 주는 말은 그 말로 인해 상처받는 이가 존재하기에 성립된다. 만약 대상자가 상처받지 않는다면 혐오 발언은 수행될 수 없고 실패한다. 혐오에 대항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반응을 멈춰 혐오의 과정을 완성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호명에 반응하지 않기란 쉽지 않다. 가령 경찰이 군중 속에서 ‘도둑’이라고 호명한 자는 어떤 반응을 하는가에 무관하게 도둑이 될 확률이 높다. 실재하는 경찰 권력에 호명 당한 개인은 도둑이라는 정체성으로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 사법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자 알튀세르의 호명 이론이 현실에 드러나는 사례다. 결국 혐오의 전제인 권력 구조가 사회에 존재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가정을 유지한 채 결과만을 막고자 한다. 더 강력한 권력으로 혐오 자체를 법적으로 규제하는 것이다.

  버틀러는 혐오 발언의 법적 규제를 전면 비판한다. 전제가 변하지 않는 이상 결과만을 가리는 국가의 규제는 오히려 ‘혐오 발언을 생산한다’고 말한다. 규제 주체가 되는 국가에 혐오를 선택할 권력이 부여되기 때문이다. 혐오 발언을 규제하기 이전에 무엇이 혐오인지를 검열하는 과정이 수반되는데, 그 결과는 또 다른 혐오로 작동할 수 있다.

  실제로 미연방법원은 백인 소년이 흑인 가족의 집 앞에서 십자가를 불태운 사건을 인종차별적 표현이 아닌 방화로 해석했다. 엄연한 인종 혐오가 규제가 아닌 보호를 받은 사건은 더 큰 인종 차별로 이어졌다.  

  또한 규제를 목적으로 집행하는 혐오 발화자 처벌에는 정당성이 부족하다. 혐오가 작동하는 기제는 언어다. 인간의 무의식은 구조화되어 있고 언어는 무의식이 구조화된 결과다. 그렇다면 발화 주체는 사회 이데올로기에 예속된 존재로 무의식을 언어로 표현했을 뿐이다. 발화 주체만을 처벌하는 규제는 혐오의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전가할 뿐이다. 법적 규제주의가 혐오의 원천을 일시적으로 가리는 행위에 불과한 이유다.

  그렇다고 버틀러가 모든 규제에 반대하는 건 아니다. 발화자가 말을 곧 행위로 만들 수 있는 강력한 권력을 가진 경우 규제는 필요하다. 하지만 행동이 수반되지 않은 경우, 증식의 우려가 있는 규제가 아니라 개개인의 저항으로 혐오의 기제를 무력화시켜야 한다.

 

  틈 속에서 피어날 변화

  그렇다면 혐오를 어떻게 거부할 수 있을까. 버틀러는 언어와 행위 사이에 존재하는 ‘틈’에 주목한다. 여기서 말하는 틈이란 말이 행동으로 이어지기까지 존재하는 시간적, 맥락적 간극이다. 발화자가 의도한 혐오와 위협 등은 이 간극 안에서 이탈·완화될 수 있다. 말은 기본적으론 반복·인용돼 사용되지만, 동일한 맥락에서 반복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맥락을 탈피한 상황에서 벌어진 간극은 발화의 실패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혐오 발언을 실패에 이르게 하는 방법으로 버틀러는 ‘재가공’, ‘부당전유’, ‘재의미부여’ 등을 제안한다. 이는 알튀세르의 비동일화 전략으로 현존하는 이데올로기에 편승하는 동시에 저항하는 방식이다. ‘재의미부여’된 혐오 발언의 예로 권명아 교수는 ‘빨갱이’를 제시했다. 과거 진보 세력을 비하하기 위해 사용했던 빨갱이라는 단어가 오늘날에는 보수·특정 지역 세력을 비하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이상한’을 의미하며 혐오를 의도했던 ‘퀴어(queer)’를 오늘날 ‘퀴어 퍼레이드’, ‘퀴어 네이션’ 등 동성애 공동체가 자신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하는 사례는 혐오 실패의 바람직한 사례다. ‘이상한’이라는 언어의 맥락과 구조를 탈피하고 새로운 의미를 반복했기에 가능한 결과다. 이로써 과거에 피해자로 지칭됐던 동성애 공동체는 피해자가 가진 수동성을 다른 형태의 행위자로 재구성될 수 있었다. 

  그러나 권명아 교수는 한국에서 버틀러의 이론이 소비되는 방식에 우려를 표했다. 현재 이뤄지고 있는 혐오 발언에 대항하는 양상이 저항적 실천으로서의 재가공 과정보다 새로운 혐오의 생산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혐오 발언을 인용하는 목적보다도 혐오 발언의 생산에서 쾌락을 찾는 한국의 ‘재의미부여’ 전략은 더 큰 난관에 봉착해있다. 저항을 위한 혐오 역시 상처를 수반하기에 사용에 신중해야 한다. 서로 다른 혐오가 맞부딪히는 경계에서 건설적인 억제는 어떻게 일어날 수 있을지 고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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