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을 통해 보여주는 `웅크림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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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기택의 언어는 조밀하다. 그것은 잘 짜여진 그물과 같다. 그 그물
망 속에는 삶에 대한 욕망의 모습들이 교차되어, 튼튼하게 직조된 그물을 이
루고 있다. 어두움의 원리가 밝음으로 드러나고 죽음의 대상을 생명의 공간
으로 감싸고 있다.
그러한 원인을 이루는 긴장은 일상성의 연속에서 오는 불안감과 두려움에
서 출발한다.
7시는 8시를 위하여 언제나 불안하다. 7시가 되기 전까지 6시는 수백 번이
나 아직은 7시가 아니라고 외친다. 7시는 6시59분59초까지 이불속에 누워 편
안한 척하는 나의 잠을 당당하게 짓밟으며 나타난다.-`8시'에서
시인은 대상에 대해서 불안하다.아니,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불편하다. 그
에게 있어서 그러한 `불안감'이나 `두려움'은 당연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
므로 그의 불안감 속에는 폭력이 내재되어 있다. 시 속에서 그는 폭력을 변
형시키고 때로는 비웃는다. 폭력은 김기택의 시에 있어서는 묘사하는 직접적
인 대상이 아니고 항상 주위에 내재되어 있는 일상성이다. 그러므로 그의 폭
력은 주범으로서의 폭력이 아닌 일상성으로서의 폭력이다. 일상성의 폭력은
정체가 불분명하다. 그러므로 시인의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불안함과 동시에
부정적이다. 일상에는 폭력이 널려 있기 때문이다.
또한 폭력이란 결국에는 죽음을 낳기 마련인데 그래서 그의 시편들은 이러
한 죽음의 모습에 많이 다가가 있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죽음의 뒷면에
생명에 대한 외경을 잠재적으로 드러낸다. 왜냐하면 죽음과 생명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며, 그의 시들은 삶과 죽음의 대립 양상을 통해서 시적
성취도를 얻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삶으로, 삶이 죽음으로 교차되는 과정을
묘사함으로써 시적 긴장을 성취한다.

힘이 세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동작인가
목 잘리지 않으려고 털 뽑히지 않으려고
닭발들은 온 힘으로 버틴다 닭집 주인의 손을 할퀴며
닭장 더러운 나뭇바닥을 하얗게 긁으며,
바위처럼 움직임이 없는 고요한 손아귀 끝에서
그러나 허공은 닭발보다도 힘이 세다 - `닭'에서

`닭'에게 있어서 위의 상황은 일상의 극단적인 폭력이다. 닭집 주인은 `모
든 움직임이 극도로 절제된 손'을 가지고 `탱탱하고 완강한 목숨을 누른다'
그러나, 닭은 버틴다. 닭의 육체가, 육체 속의 욕망이, 욕망을 지배흐는 생
명력이 허공을 움켜쥐며, `푸르르' 떨며 온 힘을 다해 버틴다. 죽은 후에도
닭은 자신의 생명력을 끝까지 과시하고 있다.

그에게 폭력을 가했던 주인에게(또 하나의 대상은 허공이다) 닭은 `힘줄을
잡아당긴 채', 생명을 노출시킨 채 죽어 간다. 그리고 시인은 마지막 진술에
서 `힘이 세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동작인가'라고 말함으로써 생명에 대한
외경을 죽음 앞에서 감탄조로 말하고 있다.

현대를 관통하는 많은 사유들중에 그 중심에 서 있는 프랑스 현대 철학은 이
전의 철학과는 달리 하나의 새로운 관심 대상을 보여준다. 리오타르의 표류
하는 욕망, 들뢰즈와 가타리의 `욕망하는 기계' 등. 물론 욕망에 관한 사유
가 이전에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전의 욕망은 인간의 이성과 구별되
는, 허위의 개념에 속한 것이었다. 이야기하자면 `욕망하는 기계'이다. 이러
한 욕망은 편재성을 지닌 것이다. 또한 이들에게 있어서는 이성 역시 이러한
욕망의 산물로 볼 수 있다.

김기택의 시들은 이러한 점에서 위의 사유들과 맥락을 같이한다. 우선 90
년대에 들어서 흔히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부르는 이들에 관한 논의들이 유
입되는 시기에 김기택의 시는 이러한 욕망의 문제를 이미 시인의 감성으로
감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들 대부분이 이러한 일상적인 욕망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다.
그가 시인으로서 더 큰 전망을 가능케 하는 것은 그가 관심을 갖는 동물들
에 관한 시편이다. 이것은 좀 더 삶과 죽음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가능케 해
주는데, 그가 다루는 많은 동물들은 내면에 조밀한 힘을 가진 것들이다. 우
리가 마주하는 `멸치'는 죽은 사물의 모습이지만, 그의 시속에서는 생명의
힘을 간직하고 있는 존재로 그려지는데, 그의 뛰어난 시 중에 한편인 `멸치'
를 보자.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
파도와 해일이 쉬고 있는 바닷속
지느러미의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
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이 떼어냈던 것이다
(중략)
두껍고 뻣뻣한 공기를 뚫고 흘러가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
이 작은 물결이
지금도 멸치의 몸통을 뒤틀고 있는 이 작은 무늬가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부르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찢었던 것이다 - `멸치'에서

그는 작은 `멸치' 하나에서 `바다'라는 본질, `바다'의 본질적 힘을 읽어 낸
다. 그럼으로써 그의 동물 시편들은 인간의 일상 속에 잠재되어 있는 본질적
힘들을 은유적으로 불러와 존재에 대한 자각을 불러 일으켜준다.

시인이 느끼는 일상에 대한 폭력은 때론 극대화되어 현실과 환상을 구별할
수 없게 하기도 한다. 그러한 세계는 인간의 판단이나 의지가 단속 당하고
욕망만이 남아 있는 세계이다.

바로 다시 번호를 돌리려던 내 손은
급히 동작을 멈추었다. 순간,
전화벨이 울렸기 때문이다.
아기의 울음소리로 - `전화를 걸다가'에서

`전화를 걸다가 번호를 잘못 돌려' 우는 아기와 통화하게 된 화자는 아이
를 달래다가 `내 손을 밀어내는 격렬한 저항을 느끼면서', 일종의 폭력을 느
끼면서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그러나 다시 전화를 거는 순간 위에서 보듯이
`전화벨'과 `아기의 울음소리'가 교차되는 환청을 듣게 된다.
그러한 상황은 결국 외부에 의해 통제 당하고, 의지를 나타내려고 하지만
그것이 억압된 일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 상황하에서도 시인은 `시계
의 조급한 초침 소리를 의식하게 되면 죽음보다 출근이 더 걱정된다'고 말한
다. 결국 일상의 폭력, 죽음을 뛰어넘는 것은 출근, 즉 생명의 출발인데 김
기택의 시에서는 폭력이 지배한 가운데서 늘 감추어져 있는, 웅크려 있는 공
간을 마련해 둔다.

어떤 철벽이라도 비집고 들어가 사는 이 틈의 정체는
사실은 한 줄기 가냘픈 허공이다.
하릴없이 구름이나 풀잎의 등을 밀어주던 나약한 힘이다.
이 힘이 어디에든 스미듯 들어가면
튼튼한 것들은 모두 금이 간다 갈라진다 무너진다.
튼튼한 것들은 결국 없어지고
가냘프고 나약한 허공만 끝끝내 남는다. - `틈'에서

그가 말의 단단함, 육체의 단단함 속에서 보았던 것은 `빛'이었고 `틈'이
었다. 그것은 냉정하고, 기계적인 현실 세계에서 시가 할 수 있는 기능이기
도 할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김기택이 지닌 희망이다. 그러나 그것은 잠재
된 희망이다. 그는 희망을 보란듯이 드러내지는 않는다. 단지 `고기를 잡을
줄 모르는 잎사귀같은 손으로 부신 눈을 비비고 있다'던지 아니면 `아마도
더 깊은 잠에 빠져 이 잠에서 깨어나려나 보다'라고 하면서 막연한 어조로써
희망을 얘기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시적 대상들에 대한 인식이 기본적으로
`허무의 인식'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 인식의 끝을 이미지화시키고 변형시키
고 있다. 그는 허무의 눈으로 생명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의 시 도처에는 그
러한 허무의 흔적들로 가득차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자신의 힘을 늦추지 않고 말과 사물의 관계를
차분히 바라볼 줄 아는 미덕을 지니고 있다. 결국 긴장의 모습들은 그러한
그의 태도에서 드러나는 것일텐데.

그는 모든 것의 신비가 육체에 숨어 있음을, 그리고 언어로 육체를 말함으로
써 끊임없이 언어와 사물 사이의, 언어와 육체 사이의 관계를 말하는 시인이
다. 그가 `얼굴'에서, 해골을 `내 얼굴이 생기기 전부터 있었음직한 그 튼튼
한 폐허'라고 이야기하듯 그의 언어는 육체를 파고들어 육체의 본질을 드러
내 준다. 해골은 원래 얼굴의 주인이었다. 그 감추어진 진실을 그의 언어는
드러내 보여 줌으로써, 우리가 일상과 일상 속의 욕망에 잠겨 잊기 쉬운 본
질들을 상기시켜준다.

그러한 그의 시들이 때로는 너무 메마르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그는 동물
시편들이나 인간의 육체와 욕망을 다루는 시들을 통해 하나의 단순한 우화를
그리는 것은 아니다. 우화는 일종의 깨달음을 주지만 그의 시는 그보다 더
나아가 육체의 본질을 자각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더욱 소중하다.
그리고 그가 보여준 이러한 시의 양식과 시의 깊이는 한국 시문학사에 있
어서 중요한 징후임에 분명하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의 이러한 모
습들을 바라보면서, 그가 육체의 조밀함 속에서 발견한 틈이 과연 어디까지
벌어질 수 있을지를 보는 일이다.

그리하여 그가 육체의 현실성 속에서 발견한 틈이 벌어질 대로 벌어져 그
가 말한 `허공' 혹은 `허공의 진실'을 이룩할 수 있을지를 지켜보는 일은 즐
거운 일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앙띠 오이디푸스'에서 이러한 욕망의 현실
을 넘어서기 위해 기꺼이 분열증 환자가 될 것을 종용한다. 그러한 점은 시
속에서 신체의 모순을 이야기하는 시인의 진술과 닿아 있다.

그렇지만 오히려 우리에게 김기택이 소중한 점은 그가 이러한 모순을 넘어
설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순을 인식할 것을 이야기함에 있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출발이 될 수 있는 지점이며, 그러한 신체의 모순,
말과 사물의 모순을 인식함으로써 문학이, 예술이 나아갈 올바른 지평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분열증의 징후가 보이기는 하지만 아직 모순에 대한 진지한 성찰
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볼 때 김기택의 목소리는 소중하
다.

그의 `틈'이 이러한 모순의 간격을 더욱 벌림으로써 그 모순을 보여줄지
아니면 다른 모습을 보여줄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의 틈이 그의 말대로 웅
크린 빛을 내비출 수 있는 알과 같은 것이 되기를 바란다.
그가 말한 것처럼 `텅빈 이 커다란 무게를 지고(`실직자' 중에서) 갈지라
도 말이다.

김병호<예술대 문예창작학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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