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리에서 자유모임으로 ‘헤쳐모여’

‘카레오이’를 아시나요? 아니, 시작때에는 카레오이였으나 지금은 ‘카레오기’가 됐다. 무슨 뜻이냐고 묻지 말라. 그냥 여성운동을 하는 이들의 모임이다. 멤버는 고작 5명. 땐싸. 푸그니, 호빵, 짜투리, 샘이 그들의 이름이다. 서로에 대해 떠오르는 이미지를 이어가다 마지막 사람이 정하는 이름으로 낙찰, 본명은 잘 모른다. 아니, 아예 관심도 없다. 대신 서로에 대해 알고 싶은 것 등을 얘기하며 명칭도 기분내키면 바꿀거란다. 이들은 동아리 등 모임이 갖는 모든 특성을 거부한다. 그저 뜻맞는 사람끼리 모임이나 갖자는 것. 최근들어 이러한 소수들의 모임이 대학사회에 급격히 번지고 있다. 90년대 들어 개개인들의 욕구는 겉잡을 수 없이 다양해진 반면 동아리 등 기존 조직들이 이를 소화해 내는데는 뱁새가 황새쫓는 격. 결국 학생들은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모임을 창궐, 뜻맞는 이들끼리 그들만의 문화를 즐기고 있다. 이를테면 그 시절 자유부인이 이제 대학에선 자유모임으로 부활한 것일까?

한바탕 지랄을 떨자

축제는 난장이다. 모든 힘겨운 삶이 한바탕 지랄을 해야 제 맛이다. ‘대학문화의 꽃’, ‘대학생활의 정점’이라 일컬어지는 대동제는 60년대 쌍쌍파티를 떠올리게 하는 ‘카니발’에서부터 7·80년대 정치색과 전통문화를 강조하며 등장한 투쟁장으로서의 대동제, 그리고 20세기 마지막 길목인 지금의 ‘대학 축제 무용론’까지 형식과 내용면에서 많은 질곡의 과정을 겪어왔다. 90년대 저속하게(?)변모한 축제형태를 두고 대학문화 죽음을 거들먹거리며 개탄스러워 하는 풍경들은 오히려 경직된 대학문화에서의 탈주라는 측면에서 쌍수를 들고 환영해야 할 터. 다소 소비향락적이고 퇴폐적인 형태를 두고 축제무용론 등이 대두되기도 했지만 오히려 내용면에서는 다양하고 풍성해진 것이 사실. 모두가 같은 구호아래 지랄을 떨어야한다는 사고는 이미 축제의 의미가 퇴색된 것일 수 있다. 이제는 대동제라는 경직된 축제명칭부터 집어던지고 ‘난장판’을 벌이는게 진정한 축제의 모습일 수 있다. 머리로의 축제에서 벗어나 남녀노소 불문하고 가슴으로 미치자는 데 누가 말릴껴?

학생회, 이제 관으로 가라

곳곳에서 장례식이 한창이다. 그러나 이들의 슬픔은 권위주의 정권에 의해 짓이겨진 선배의 주검 때문은 아니다.

서울대, 성균관대를 비롯한 서울시내 대학은 물론이고 경북대, 수원대 등의 지방대학에서도 불붙듯이 번져나가고 있는 이 장례 행렬. 이들의 구호는 “비민주적이고 폭압적인 X같은 정권 물러가라” 가 아니라 “우리는 그 영웅담을 듣고만 있는 멍청한 후배가 아니다. 권위주의 학생회 물러가라”이다. 파시스트 정권 앞에서 용감하고 역으로 학생주제에게는 교조적이며 권위주의적이었던 자신들의 대표기구에 당당히 ‘죽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파시스트 정권에 대항하여 온몸을 불살랐던 80년대 학번. 말 할 권리마저 사라져 버린 사회의 마지막 보루는 대학이었으며, 학생회는 일반 대중은 물론 대학생주체에게 까지 교조적인 입장의 선전 선동을 담보해야만 하는 시대적인 소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여당도 야당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 이데올로기 자체의 향수에 젖는 것이 퍽 오래된 얘기가 되어버린 새 세기. 교조적인 입장에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가슴이 아닌 머리로 이해시키려는 학생회 권력은 그 자체가 슬픔이 될 것이다.

‘클릭 한 번으로 등교 끝(!)’

2015년, 서울의 한국대학 3학년생 김하늘군이 무려 1천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세계최고의 가상대학인 글로벌유니버시티에서 주최하는 제 10회 세계 학생 삼포지엄의 발표자로 선택된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이 심포지엄은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에 다국어 버전으로 생중계될 예정이며 당연한 얘기지만 심포지엄 참석자들은 집안에서 클릭 한번으로 심포지엄에 참석할 수 있게 된다.

“형식이 내용을 바꾼다.” 이 지극히 평범한 명제는 수요자 중심으로 개별화되는 교육환경의 형실에도 예외없이 적용되고 있다. 기존의 물리적인 공간을 중심으로 행해지던 전통적인 학습방식 대신 가상대학이라는 틀 속에서 수요자가 원하는 교육서비스를 원하는 장소, 시간, 나아가가 학습계획까지 스스로 선택하고 설계할 수 있는 자기주도적이고 개별적인 학습환경조성이 가능해진 것이다. 지식정보사회로의 전환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가상대학이 주는 울림은 결코 작지 않다. 교육은 사회를 평등하게 만드는 중요한 수단이다. 가상대학은 현실세계의 평등보다 가상세계의 그것을 쉽게 구현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도서관을 미국 비버리힐즈에 있는 도서관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면 어마어마하게 큰 돈이 필요할 것이나 모든 가정을 온라인 서비스망으로 연결하면 누구든 동일한 정보를 받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학교는 전쟁중:날 사이버 전사라 불러다오

경쟁 사회에서 도태되지 않고 사는 것이 결코 만만치가 않다. 오죽하면 사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라는 말까지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평생 일만 하며 살 수 없는 법. 누구나 놀이를 찾게 되고 놀고 싶어한다. 이른바 지식인들의 집단이라 일컬어지는 대학사회의 놀음짓은 어떠한가. 60년대 대동이라는 축제가 ‘죽어도 함께 죽고 놀아도 함께 놀자’는 공동체 문화를 형성했다면 70년대 들어 조금씩 일기시작한 소비풍조는 대학가 음주문화라는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냈다.

최근에는 이른바 사이버 전사들이 대학가를 활보하고 있다. 이들은 어떤 무기로 컴퓨터 공간에서 전쟁을 치르는 것일까. 이들 게임들은 컴퓨터간 통신포트를 직접 연결하는 ‘일대일’ 게임방식이 하나의 통신서버에 접속한 여러명의 사용자가 동시에 즐기는 ‘네트워크 게임’ 방식으로 대치된 것이다. 이러한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은 사용자들을 ‘빨아들이는’ 강한 흡인력을 지닌다. 이들이 게임에 빠져드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보통 ‘재미있기 때문에’라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그리고 이 ‘재미’에는 “왕이 된 듯한 기분”,“익명의 상대를 이기며 느끼는 가학적 쾌감, “새로운 세계의 경험” 등 다양한 요소들이 포함된다. “환타지가 거세된 일상, 정치/경제 과잉의 사회”에서 이‘사이버중독증’의 원인을 찾는 문화평론가 한정수씨의 생각처럼, 자유로운 ‘상상(fantasy)’들이 펼쳐지기에 현실은 너무 삭막한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전공도 다국적

Y군:“너 전공이 뭐니?”

V양:“Y의 비극이군요. 전 밀레니엄 학번, 전공은 말못합니다. 전문 분야는 무역이고, 다국적 기업론을 공부하기 위해 제3세계 문화와 연계하고 있으며, 외국어로 디자인하고 있죠” 21세기 전공을 묻지 마라. 묻는 즉시 구세대가 된다. 모든 대학이 국립대학 시스템인 호주의 경우나 학부제의 전형적인 모델인 캐나다의 경우가 실증적인 예.

이제 과거의 교양은 ‘0***’로 1학년 학생을 위한 강의는 ‘1***’로 2학년은 ‘2***’식으로 구분되는 디지털 방식에 의해 주전공과 교양과목의 구분이 이루어지고, 자신이 선택한 부전공,능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복수 전공, 커리큘럼을 자신이 설계하는 ‘디자인 전공’등의 새로운 전공 개념이 도입될 확률도 농후하다. 전공의 벽이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학생의 주체적 권리를 존중하게 된다면 미네소타 대학의 예와 같이 특정 학과 교수는 사라지고, 복수학과 소속의 전문 분야로 묶여질 수도 있다.

새 세기에 학생은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 지의 선택을, 교수? 연구할 것인지 가르칠 것인지의 부분만을 선택하면 OK다.

책 파면 돈 나와 (!)

이제 연구실 안에서 돈을 벌 수 있다. 이제 교수 연구실은 일종의 벤처 기업, 교수는 사장, 연구 학생은 고용직원의 탄탄한 기업시스템으로 인식 될 날도 멀지 않았다.

실제로 숙명여대 정보과학부 백윤주 교수는 인터넷 서비스 개선을 위한 프로그램 개발로 자본금 3억에 석 박사 17명을 원격 교육 시스템용 네트워크 소프트웨어 CATS를 개발한 한국항공대학 연구진 역시 연간 15억의 이윤을 얻고 있다. 미국의 버클리 대학의 경우도 유전공학 전문 연구진과 계약 하에 연간 2천 5백만 달러의 발전 기금을 확보하고 있으며 점차 타 대학에도 확산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물론 지식의 상품화 경향과 학문의 순수성 부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간과할 수는 없지만 이미 교수 및 연구진들의 노력은 자본주의 시대에서 또 하나의 이윤 창출의 수단이 되고 있다. 공부만 하면 돈도 나오고 쌀도 나오는 바야흐로 ‘지식 제일 주의’시대의 도래는 거스를 수 없는 추세이다.

‘교육부 이제 손떼시지’

‘스스로 터득하게 하라’는 유태인의 교육지침은 21세기 교육부가 새겨들어야 할 제1지침이 될 것으로 보인다.

교육부가 조장해 왔던 일부대학의 서열화 정책은 우수한 교수를 독점하는 시스템을 필연적으로 야기시키고 있다. 이같은 정책 속에서는 홍콩 과기대와 같이 개교 10년만에 교수 교류로 국제적인 대학으로 성장할 수 없다. 더욱이 지방대학의 경우 역시 자구책 마련 면에서 이미 교육부를 앞지른 상태이다. 이는 적자 생존의 원리 이외에는 미온적인 대처만 해오던 교육부와는 달리 지역연합으로 고등교육부터 학점 교류 등의 방법을 통해 우수 학생유치에 힘쓰고 있는 전남지역 대학 사례가 증명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대학의 비리 관련 부분에 있어서도 교육부의 감독, 감수는 끝임 없는 허점을 보여 주고 있다. 이미 교육부는 99년 12월에 불거져 나온 사학비리 부분의 감독 감시를 유보하고 오히려 분규 종식 대학의 경우를 심하게 감시하는 등의 처사로 학계의 질타를 받아왔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원칙 없이 변화하는 교육부의 정책, 그럼에도 ‘대학발전은 한국의 미래’라는 등식으로 인해 묵인되어 왔던 교육부의 간섭은 세계 유수 대학의 자율성과 발전이라는 측면과 대비하여 비판받고 있으며, 시정 없이는 ‘교육부 너나 잘 해’와 같은 대학내 유행어는 21세기에도 유효 할 것이다.

학문에는 연령도 없고, 공간의 벽도 없다

정규 시험을 보고 들어 온 학생만이 대학생이고, 캠퍼스 안의 공간만이 대학의 영역일까? 21세기는 ‘NO’라고 발하고 있다. 대학의 위상이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평생교육, 바로 이 개념은 정규대학생보다 1.5배 가량이나 많은 20만명의 외부 원생을 교육하고 있는 핀란드는 물론이고, 프랑스, 스페인 동유럽 전역에 걸쳐 퍼지고 있다. 지난해 타임즈가 선발하는 ‘올해의 대학’에 선정했던 켈리포니아 대학이 선정된 것도 대학과 사회의 연계 프로그램의 우수성 때문으로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기존의 아카데미즘으로 외부와 단절되었던 대학의 교육이 평생교육교육 개념에 의해 지역사회의 서비스라는 부분으로 제공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지역을 단순히 소비를 매개로 하는 학문 외적 공간으로 인식하는 것은 이미 옛날 얘기다. 산학협동단지의 발전과 다양한 지역 연계를 통해 대학의 활로를 모색하고 있는 중앙대, 시민단체와 대학의 상호 필요성을 언급하는 부산대, 시민세력이 일종의 후원자 역할을 하고 있는 연세대 등 이제 바야흐로 대학은 연령이 없는 학문의 공간, 삶의 터전인 지역사회와 담을 쌓지 않는 열린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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